전설의 엔지니어들 - 루돌프 울렌하우트 (1)

조회수 2021. 7. 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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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애로우’의 황금기를 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자동차 세계에서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메르세데스-벤츠라고 하면 E-클래스 또는 S-클래스를 떠올릴 만큼, 안락하고 잘 달리는 고급 세단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개성 있는 스포츠카 만들기를 계속해 왔을 뿐 아니라, 모터스포츠 분야에서도 역사적으로 굵은 획을 그은 브랜드기도 하다.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이라 할 포뮬러 원(F1)에서는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팀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연속으로 컨스트럭터 챔피언을 차지했다. F1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인 페라리가 기를 펴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성적이다.

2021 포뮬러 원(F1) 시즌에 활약하고 있는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팀의 W12 E 퍼포먼스 경주차 (출처: Daimler)

물론 지금의 F1 운영 시스템 특성상 ‘경주차의 기술을 양산차에 반영한다’는 모터스포츠의 오랜 격언은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터스포츠에 참여하는 대다수 양산차 업체가 모터스포츠를 기술의 시험장으로 적극 활용했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고, 먼 과거로 갈수록 격언은 진리에 가까왔다.

메르세데스-벤츠도 예외는 아니다. 1994년에 엔진 공급업체로 F1에 복귀하기까지 국제적 규모의 모터스포츠에서 40여 년간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 공백의 계기가 된 1955년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일어난 참사 이전의 메르세데스-벤츠는 유럽 모터스포츠계의 손꼽히는 강호 중 하나였다.

1930년대 독일 '실버 애로우' 시대를 빛낸 메르세데스-벤츠 W 125 경주차 (맨 아래와 그 위, 아래에서 다섯 번째, 출처: Daimler)

특히 1930년대에 아우디의 전신인 아우토 우니온(Auto Union)과 더불어 독일의 ‘국가대표’로서 활약하며 얻은 질버파일(Silberpfeil), 영어로 실버 애로우(Silver Arrows)라는 별명은 당대 유럽 모터스포츠계에서 가장 빛나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양대 실버 애로우 가운데 메르세데스-벤츠의 경주차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로 루돌프 울렌하우트를 빼놓을 수 없다.

‘달리는 엔지니어’

루돌프 울렌하우트(Rudolf Uhlenhaut)는 1906년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도이체 방크(독일 은행) 영국 지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영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울렌하우트 가족은 이후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독일 브레멘으로 이주했다. 성장한 울렌하우트는 뮌헨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1931년에 다임러-벤츠에 입사했다.

함께 개발에 참여한 1955년형 메르세데스-벤츠 190 SL과 나란히 선 루돌프 울렌하우트(왼쪽)와 프리츠 날링어 (출처: Daimler)

시험 부문에서 일하던 울렌하우트는 오래지 않아 상사인 프리츠 날링어(Fritz Nallinger)의 눈에 들었다. 날링어는 그의 재능을 금세 알아차렸다. 시험 과정에서 울렌하우트는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차를 잘 다뤘고, 기술자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엔진과 섀시 등 차의 기술적 요소 전반을 두루 경험하며 성과를 내어, 1935년에 승용차 개발부 시험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훌륭한 인품과 친절한 태도 덕분에, 그는 곧잘 주변 사람들로부터 '루디(Rudy)'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이런 원만한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운전 실력이 무척 뛰어나, 프로 경주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사무실에서 설계와 기술에만 매달리지 않고, 직접 차를 몰고 시험하며 문제점을 찾아내는 '실전파' 엔지니어였던 셈이다. 그리고 탁월한 소통능력으로 엔지니어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기술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 그의 별명은 곧 ‘달리는 엔지니어’가 되었다.

루돌프 울렌하우트 (출처: Daimler)

그러던 울렌하우트에게 전환점이 되는 일이 벌어진다. 1936년에 다임러-벤츠가 경주차 부서를 새로 만든 것이다. 1929년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하기 전은 물론 합병 이후에도 모터스포츠 활동을 이어왔던 다임러 벤츠는 대공황 여파로 1931년에 모터스포츠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나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럽 그랑프리 대회를 통해 독일의 우수성을 과시할 수 있도록 모터스포츠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그랑프리 대회는 국제자동차연맹(FIA)의 전신인 AIACR(국제유명자동차클럽협회)이 주관하는 국가 대항전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당은 이를 선전 도구로 활용하려는 생각이었다. 이런 국가적 요구에 동참한 것은 메르세데스-벤츠를 만드는 다임러-벤츠와 아우토 우니온이었고, 아우토 우니온에 이어 메르세데스-벤츠는 1934년부터 모터스포츠 활동을 재개했다.

1934년 규정에 맞춰 만들어진 경주차는 W 25였다. 오랫동안 메르세데스-벤츠 기술 책임자로 일했던 한스 니벨(Hans Niebel)이 설계한 이 경주차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페인트를 벗겨낸 알루미늄 차체로 실버 애로우라는 별명을 얻은 주인공이었다. 이 경주차는 1934년과 1935년에 유럽 그랑프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1934년 11월에 설계자인 니벨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로 개선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실버 애로우' 전설의 시발점이 된 메르세데스-벤츠 W 25 경주차 (출처: Daimler)

경주차 규정변경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W 25 경주차는 1936년 시즌 초반에 아우토 우니온 타입 C 경주차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냈고, 메르세데스-벤츠는 결국 시즌 중반 출전을 중단했고, 1937년 시즌을 위한 새 경주차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엔진 개발을 총괄하고 있던 날링어는 시험 부서 산하에 경주 부서를 새로 만들었고, 울렌하우트를 경주 부서에서 일하도록 했다. 불과 30세였던 울렌하우트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나 시험 부서와 설계 부서의 조율에 그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W 125 경주차로 유럽 그랑프리를 휩쓸다

이 과정에서 실전파 울렌하우트는 자신의 능력을 경주차 개발에 쏟아 부었다. 경주 선수들과 엔지니어들 사이의 소통은 지금도 그렇듯 과거에도 쉽지 않았는데, 울렌하우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과정을 훌륭하게 조율했다. 책임자 자리에 오른 뒤, 그는 당시 메르세데스-벤츠 팀 소속 선수였던 루돌프 카라치올라(Rudolf Caracciola)와 만프레드 폰 브라우히치(Manfred von Brauchitsch)와 함께 W 25 경주차를 직접 몰고 뉘르부르크링을 달리며 시험 주행을 했다. 그는 섀시와 서스펜션이 트랙 주행에 어울리지 않음을 확인했고, 경주차를 대대적으로 개선했다.

철저한 시험으로 W 25의 문제점을 개선해 만든 메르세데스-벤츠 W 125 경주차의 내부 (출처: Daimler)

울렌하우트는 W 25의 근본적 문제점을 서스펜션 설정에서 찾았다. 니벨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경주차 서스펜션은 스프링은 단단한 반면 댐핑은 충분하지 않아 고속 주행 안정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부드럽고 크게 움직이는 스프링과 단단한 댐퍼를 결합하는 반대 개념의 설정을 도입했다. 이는 높은 출력을 내는 엔진을 얹은 경주차의 고속 주행 안정성을 크게 높였다.

많은 부분을 W 25에서 물려 받았지만, 이처럼 중요한 변화를 겪은 새 경주차 W 125는 1937년 5월에 열린 트리폴리 그랑프리에서 데뷔와 함께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금 메르세데스-벤츠를 유럽 그랑프리의 강자로 만들었다. 1937년 AIACR 유럽 선수권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차지였고, 드라이버 선수권에서도 1위부터 4위까지 메르세데스-벤츠 소속 선수들이 독차지했다.

메르세데스-벤츠 W 125 경주차. 울렌하우트의 재능이 빛을 발한 차다 (출처: Daimler)

울렌하우트는 걸작 경주차 W 125를 통해 실버 애로우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W 125 경주차가 쓰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탁월한 설계 덕분에 가히 파괴적이라할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트랙 특성에 맞춰 크고 작은 요소들을 쉽고 빠르게 바꿀 수 있도록 만든 덕분에 어디서든 최고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연한 스프링과 단단한 댐퍼의 조합이라는 서스펜션 기본 설정은 메르세데스-벤츠가 그 뒤로 만든 모든 스포츠카에 반영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력한 엔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직렬 8기통 5.7L 엔진은 슈퍼차저의 도움으로 600마력을 넘는 힘을 냈다. 이는 당대 경주차 중 가장 강력한 성능이었고, 포뮬러 원(F1) 경주차 엔진에 터보차저가 폭넓게 쓰이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이 될 때까지 그랑프리 경주차에서 W 125의 성능을 뛰어넘는 엔진은 쓰이지 않았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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