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엔지니어들 - 조라 아쿠스던토브 (2)

조회수 2021. 10. 1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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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을 상징하는 스포츠카를 빚은 '콜벳의 대부'

(이전호에서 계속됩니다)

아쿠스던토브는 '스포츠카를 빛내려면 경주에 출전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이미 유럽의 유명 스포츠카를 두루 경험하고 경주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그에게 콜벳은 반쪽짜리 스포츠카였다. 그는 콜벳은 물론 쉐보레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절실한 것은 고성능 옵션과 경주 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나섰다.

사실 그는 엔지니어면서도 경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레이서기도 했다. 그는 르망 24시간 경주에도 출전해, 1954년과 1955년에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그가 몬 차는 포르쉐 550 스파이더였다). 1955년에는 쉐보레 시제차로 파이크스 피크 힐 클라임 경주에 출전해, 스톡 카 부문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가 세운 17분 24초 05의 클래스 기록은 이후 12년간 깨지지 않았다. 나아가 1956년에는 데이토나 비치에서 콜벳으로 시속 150.583마일(시속 242.288km)의 ‘플라잉 마일’ 기록을 세웠다.

1957년에 경주용으로 만들어진 쉐보레 콜벳 슈퍼 스포트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GM 경영진에게 그의 활동은 이만저만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다. 아쿠스던토브는 경영진과의 마찰 속에서 때로는 정면으로 부딪쳤고 때로는 그들을 속이며 자신의 일을 해 나갔다.

그는 콜벳으로 르망 24시간 경주를 비롯한 스포츠카 경주에 출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주변 환경은 계획의 실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1950년대 중반 여러 경주에서 있었던 대형 사고와 당시 유행하던 드래그 경주가 '자동차 경주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GM을 포함한 미국 자동차제조업체협회(AMA)는 자동차 업체의 경주 참여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쿠스던토브는 멈추지 않았다. 르망 출전을 위해 개발하던 콜벳 경주용 모델을 경영진 몰래 미국 자동차 경주에 출전시킨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공식적으로 나서지 않았지만, 그는 경주 현장에서 차의 성능을 확인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GM에서 그보다 스포츠카와 콜벳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콜벳을 본격 스포츠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

그는 콜벳을 더욱 강력하고 몰기에 즐거운 차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험을 했다. 1957년에 제안한 Q-콜벳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념을 담고 있었다. 연료분사식 스몰블록 V8 엔진, 네바퀴 독립 서스펜션 및 디스크 브레이크, 트랜스액슬 구동계 배치가 포함된 아이디어가 하나의 차에 모두 구현되어 있었다. 물론 당대 양산차에 그의 아이디어를 반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그 시절에 제시한 개념이 양산 콜벳에 처음 구현된 것은 1997년에 나온 5세대 모델에 이르러서였다.

포뮬러 경주차를 연상케하는 미드엔진 구조가 특징이었던 CERV I. 뒤에 선 인물이 조라 아쿠스던토브다

1959년에 그는 기술 시험을 빌미로 '쉐보레 엔지니어링 리서치 비히클(Chevrolet Engineering Research Vehicle)', 줄여서 CERV 시리즈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CERV 시리즈는 섀시에서 엔진, 브레이크와 타이어에 이르기까지 고성능 차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다양하게 시험하는 데 활용되었다. 1960년에 선보인 CERV I은 포뮬러 경주차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 특별했고, 1964년에는 모노코크 차체 구조의 CERV II를 만들었다. 이들은 미드엔진 동력계 배치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특히 CERV II는 세계 최초의 미드엔진 풀타임 네바퀴굴림 차기도 했다.

물론 CERV I과 CERV II에는 미드엔진 콜벳 개발에 대한 아쿠스던토브의 의지도 담겨 있었다. 그 뒤에 '미래의 콜벳'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여러 콘셉트카가 미드엔진 배치로 만들어진 것도 이유는 같았다. 심지어 그가 은퇴한 뒤에 나온 에어로벳(Aerovette), 콜벳 인디(Corvette Indy), CERV III와 같은 콘셉트카들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62년에 출시된 2세대 쉐보레 콜벳 '스팅 레이'. 1세대와는 차별화된 스포티함이 돋보였다

그의 다양한 시도에 힘입어, 1962년에 출시된 2세대 콜벳 '스팅 레이(Sting Ray)'는 많은 부분이 보완되었다. 그동안 실험했던 결과를 바탕으로 프레임을 강화했고, 독립식 뒤 서스펜션과 디스크 브레이크를 갖췄다.

성능도 개선되었다. 고성능 연료분사 장치, 다중 카뷰레터, 대배기량 V8 엔진, 내구성이 뛰어난 4단 수동변속기 등을 갖춘 2세대 콜벳은 이전 세대의 판매 부진을 말끔히 씻어버릴 만큼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성과에 힘입어, 아쿠스던토브는 1967년에 콜벳 담당 책임 엔지니어가 되었다.

8세대 모델로 사후에 완성된 '미드엔진 콜벳'의 꿈

3세대 콜벳은 아쿠스던토브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여러 고성능 패키지가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1967년에 출시된 3세대 콜벳은 일본계 미국인 디자이너 래리 시노다의 디자인과 더불어 혁신적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공식적으로는 가오리를 뜻하는 스팅레이(Stingray)라는 별칭이 있었지만, 애호가들에게는 앞서 선보였던 콘셉트카들에 붙었던 청상아리(Mako Shark)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졌다. 3세대 콜벳은 역대 콜벳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모델로 여겨진다.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할 많은 특별 모델과 고성능 패키지가 잇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아쿠스던토브가 20년 넘게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동안, 콜벳은 점점 더 고성능 스포츠카다운 모습을 갖춰 나갔다. 콜벳 팬들이 사랑하는 슈퍼 스포트와 그랜드 스포트, L88, ZL1, Z06, ZR1 패키지 등이 모두 그에 의해 탄생했다. 그는 양산 콜벳에 만족하지 않고 언젠가는 미드엔진 모델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이미 시장에 자리를 잡은 스포츠카를 더 혁신적으로 바꾸기는 것은 당시 GM 조직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1966년형 쉐보레 콜벳 스팅 레이와 함께 선 조라 아쿠스던토브

오히려 1970년대 두 차례 세계를 강타한 석유파동과 GM의 위기 속에서 콜벳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성능과 스타일에 매료된 팬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개발을 이끌었던 3세대 콜벳이 다음 세대 모델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은 데뷔 후 15년이 지난 1982년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65세를 맞은 아쿠스던토브는 1974년 말에 은퇴해 GM을 떠났다.

그는 은퇴 후에 쉐보레와 튜닝업체들과 교류하며 기술자문을 했고, 다양한 콜벳 관련 행사에 참여하며 팬들과 소통했다. 1991년에는 콜벳의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5년 1월에는 미국 켄터키주 볼링 그린에 세워진 콜벳 박물관에서 그의 85세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행사에는 약 12만 명이 모여, 콜벳을 미국 스포츠카의 상징으로 만든 그에게 감사인사와 찬사를 보냈다.

아쿠스던토브가 꿈꾸던 미드엔진 콜벳은 2019년에 8세대 콜벳으로 실현되었다

흡연이 남자들의 멋이었던 시절을 보낸 그에게도 담배는 떼어놓을 수 없는 기호품이었다. 나중에 담배를 끊기는 했지만, 그는 1995년에 발병한 폐암의 영향으로 1996년 4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19년 7월, 마침내 그가 생전에 그토록 만들고 싶어했던 미드엔진 콜벳이 미국 플로리다주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오랜 콜벳 팬들이 8세대 모델을 대하면서 '콜벳의 대부' 아쿠스던토브를 떠올린 것은 당연하다.

| 글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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