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드라이빙 메모리 (7) - 대우자동차의 희망을 담은 첫 고유 모델, 에스페로

조회수 2021. 7. 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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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사항으로 그친 대우의 야무진 기대

프롤로그 – 국산차의 고유 모델 러시

현대 포니의 성공은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국산화라는 정부 과제에 열심이던 자동차 업체들이 포니라는 고유 모델의 성공에 새로운 좌표를 정하게 되었다. 포니의 ‘독자 모델’이라는 신분은 내수 시장에선 ‘애국적 자부심’을 자극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수출입국(輸出立國)’을 구호로 내걸었던 기업들엔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카드였다.

포니, 스텔라, 쏘나타로 라인업을 차린 현대는 이들 고유 모델로 내수 시장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수출에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우와 기아는 르망과 프라이드라는 라이선스 생산 소형차로 내수 시장과 수출에 대응하는 수준이었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만 놓고 보더라도 1980~90년대 국산차의 수준은 고유 모델과 라이선스 생산 모델의 차이가 없었다. 아니, 때로는 라이선스 생산모델이 더 나은 부분도 있었다. 조종성이나 경제성은 기아 프라이드가, 차체 강성이나 승차감은 대우 르망이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톱 랭커는 언제나 현대 엑셀과 프레스토였다.

확고한 1위 자리를 포기하고 치열한 2위 경쟁을 벌이던 대우와 기아의 경쟁은 그룹 규모나 자금력이 앞서는 대우에게 유리했다. 만년 2인자로 굳어지기를 거부했던 대우는 첫 고유 모델로 중형차를 내놓았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던 소형차 시장을 놓아두고 중형차 시장을 노린 이유는 분명했다. 소형차 시장에서는 나름 경쟁력을 가진 르망이 건재했고, 비록 현대 쏘나타에 밀리긴 했지만 ‘고급 중형차’ 이미지의 로열 시리즈가 있었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온 쏘나타와 경쟁할 중형차를 내놓아 ‘소형차는 현대, 중형차는 대우’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희망을 담은 이름 에스페로

J-car란 개발명으로 시작한 대우자동차의 첫 고유 모델 중형차는 현대의 고유 모델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 기술협력사(GM)의 섀시를 바탕으로 디자인 전문회사의 스타일링을 얹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J-car는 당시 중형차 시장에서는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여기에 GM의 호주 자회사인 홀덴이 개발한 2.0L 엔진을 얹고 제품수명이 다해가는 로열 시리즈를 대체하길 그리고 당시 중형차 시장의 왕좌를 지키고 있던 쏘나타(Y2)를 물리칠 기대를 품고 ‘기대하다’ 혹은 ‘희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에스페로(Espero)란 스페인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대우의 야무진 기대는 그저 희망 사항으로 그쳤다. 차체 크기나 편의 장비 그리고 출력과 같은 숫자를 맹신하는 보수적 중형차 소비자들의 기준에 비추어 에스페로는 쏘나타보다 나은 것이 없는 셈이었다.

이런 절망적 상황은 현대에서 엘란트라라는 준중형차가 등장하면서 에스페로에게 체급 변경을 강요하게 되었다. 잔뜩 희망에 부풀었던 중형차 타이틀 매치에서 고배를 든 에스페로는 ‘준중형차’라는 새로운 체급에 눈을 돌려 엘란트라와 2차 타이틀 매치를 벌이게 된다. 준중형차 시장으로 타겟을 바꾼 에스페로는 90마력 1.5L 엔진을 새로 얹고 엘란트라보다 큰 체구를 무기로 링에 올랐지만, 또다시 절망적인 성적표를 받고 8년만에 은퇴했다.

지난달 필자가 시트로엥 XM을 얘기했을 때 많은 댓글에 시트로엥 XM과 같은 베르토네 디자인의 에스페로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에스페로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스타일링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었다. 사실 에스페로의 스타일링은 90년도 데뷔 당시에는 전위적 혹은 파격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신선했다. 실제 에스페로 오너는 쏘나타나 로열 시리즈의 오너들보다 더 젊거나 젊은 감각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희망이란 이름의 에스페로에서 느낀 절망

필자가 에스페로를 처음 접한 것은 100마력으로 출력이 높아진 1.5L DOHC 엔진을 얹은 94년형 5단 수동 모델이었다. 당시 로버 미니를 타던 시절이었는데 스위스에서 알던 친구 둘이 보름 동안 한국 여행을 하겠다며 찾아와 급히 큰 차를 찾다가 평소 필자의 미니에 군침 흘리는 친구에게 보름만 바꿔타자고 꼬드겨 얻은 기회였다. 평소 에스페로의 날렵하게 생긴 스타일링에 호감이 있던 필자는 ‘왜 그리 안팔릴까?’하는 의문도 있던 차에 한국 여행 안내를 핑계로 에스페로 즐기기에 나섰다.

처음 차키를 건네받고 세련된 버건디색 에스페로에 올랐다. 약간 빈약해 보였던 첫 모델의 테일라이트가 커진 것만으로도 외형이 크게 나아진 에스페로의 운전석에 오르자 느낌이 좀 묘했다. 낮은 시트 포지션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멋진 시트는 지지력이 부족했다. 낮게 느껴지는 천장의 압박감과 10장의 유리로 이뤄진 글라스 에어리어의 개방감이 어색한 조화(?)를 이루었다.

실내를 둘러보았다. GM과의 결별 혹은 거리 두기를 시도한 대우의 첫 고유모델임에도 오펠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떻든 180cm가 넘는 건장한 스위스 친구 둘과 그들의 짐을 싣기에 부족함 없는 공간이 만족스러웠다. 처음 본 화려한 서울거리 그리고 폭스바겐 골프와 푸조 205를 타는 그 친구들의 수준에서는 엄청나게 큰 차인 에스페로에 대한 감탄으로 약 2,000km의 전국 여행이 시작됐다.

언제나 처음 차를 타면 감각이 예민해진다. 그런 때문일까? 에스페로의 반응은 한마디로 묘했다. 앞서 얘기한 에스페로의 묘한 느낌은 달리면서도 이어졌다. 클러치 디스크가 닳았나 착각할 정도로 출발이 느리다. 시내 구간을 달리면서 느낀 반응은 아랫급 르망보다도 못한 느낌이었다. 헐렁한 변속기 조작도 거슬렸다. 프라이드의 절도 있는 변속 조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비로소 약간의 독일 피가 섞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국산차 중에서는 고속주행 안정감이 높은 축에 낀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제야 생김새만큼 날렵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용하진 않았다. 분명 공기저항계수가 0.32라나 뭐라나 하는 광고를 보았는데 낮은 공기저항계수에서 가졌던 기대감이 약간 무너졌다.

첫 목적지인 설악산을 가기 위해 일부러 미시령 코스를 택했는데, 핸들링 반응은 만족스러웠지만 제동성능이 조금 부족한 듯 느껴졌다(빈약한 제동성능은 에스페로만의 문제는 아니고, 당시 국산차의 제동성능은 전반적으로 낮았다). 그런데도 현대차나 기아차에선 기대할 수 없는 화끈한 냉방성능을 자랑하는 에스페로의 에어컨으로 더운 여름의 장거리 주행은 즐거웠다.

하지만 양양에서 속초까지 이어지는 국도로 들어서자 가장 큰 실망이 느껴졌다. 당시 국도는 구간마다 공사가 이뤄지고 있던 탓에 노면이 무척 안 좋았다. 때로는 포장이 깨진 곳을 달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형편없는 노면을 달릴 때 에스페로의 치명적인 단점이 드러났다.

타이어에서 올라오는 노면 충격 대부분을 서스펜션이 잘 걸러줌에도 차체 여기저기서 삐걱 거리는 소음이 차내에 울릴 정도였다. 차체가 구조적으로 약한 차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소음은 50년대 설계의 로버 미니같은 차에서도 10년 쯤 넘겨야 나는 소음이다. 90년 가을 데뷔해 만 4년이 지나 마이너 체인지까지 거친 94년형 에스페로가, 소음을 줄이기 위해 앞쪽에 있던 오디오 안테나를 뒤쪽으로 바꾸는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그 에스페로가 근본적인 차체보강에 소홀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보름의 동행이 끝나고 인천공항에서 친구들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에스페로에 대한 느낌을 정리해보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에스페로라는 차가 독특한 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련된 스타일링에 여유 있는 패키징, 안락하고 안정감이 돋보이는 고속주행성 등 준중형차 수준을 넘어서는 모습 등이 끌렸다.

그리고 한 달 뒤 아내의 차로 뉴 엘란트라 1.5 GLSi를 뽑았다.

사족(蛇足)

필자는 에스페로가 여성 오너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클러치나 시프트의 조작감이 떨어지지만, 자동변속기를 더하면 큰 단점 하나는 해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격한 운전을 거의 하지 않는 대부분의 여성 운전자라면 에스페로의 실망스런 구석을 느낄 상황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떻든 경쟁 모델인 엘란트라보다 약간 비싸지만 좀 더 크고 개성 넘치는 에스페로를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자는 아내의 차로 엘란트라를 골랐다. 아내에게 까칠하고 어설픈 꽃미남 보디가드보다는 수수하지만 무던한 보디가드를 붙여주는 것이 옳지 않나?!!!!!

한장현 (자동차 칼럼니스트,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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