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포드와 제임스 J. 쿠젠스

조회수 2021. 9. 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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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드의 성장에 가속도를 붙인 만남

19세기 사람들은 자동차를 반기지 않았다. 말보다 비싼 값과 어려운 유지 보수에 서민들은 외면했다. 부자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다. 초기 자동차는 자본가나 사업가라 할지라도 소유가 쉽지 않았다. 긴 조립 시간 탓이었다. 차가 완성되어 나오기 전까지 1년 이상 걸리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헨리 포드(이하 포드)가 있었다.

1900년 디트로이트 거리 풍경 (출처 Detroit News Collection)

포드는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퇴근 후 창고에서 엔진과 기화기 등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무거운 차체를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마침내 포드는 1896년 6월에 자신의 첫 번째 차를 완성했다. 손수 만든 2기통 엔진을 얹은 모델로 쿼드리사이클(Quadricycle)라 칭했다.

1896년 포드가 처음 제작한 쿼드리사이클 (출처 Flickr)

무게는 약 475kg으로 가벼웠다. 덕분에 4마력의 힘으로도 시속 약 32km까지 주행할 수 있었다. 포드는 이 차를 몰고 디트로이트 거리에서 달렸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포드에게 “자동차 회사 설립을 생각 중인가”라 묻기도 했다.

1896년 쿼드리사이클을 타고 있는 헨리 포드 (출처 wikipedia)

정작 포드는 자동차 비즈니스에 관심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엔지니어라 생각했다. 단순한 설계, 합리적 가격, 좋은 품질의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수익이 생기면 다음 모델의 제작 비용으로 충당했다. 그때 그가 만든 자동차 관련 제품들은 우수하다고 평가받았다. 이는 투자가들의 구미를 당기기 충분했다.

| 연속되는 포드의 실패

결국 1899년 포드는 12명의 투자자에게서 지원을 받아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Detroit Automobile Company)를 세웠다. 그는 사장이 아닌 기계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때까지 자동차를 더 연구하고 싶어 선택한 자리였다. 설립 후 포드는 1년 6개월 동안 12대의 트럭을 제작했다.

1900년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 앞에 포드가 설계한 트럭 중 하나가 서 있다 (출처 thehenryford)

이때 완성차 대부분은 제때 출고하지 못 했다. 제품의 성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포드가 출고를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의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결국 계약일을 지키지 못해 포드는 거래처와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헨리 포드의 첫 번째 회사는 파산했다.

체계화된 생산 공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 공장 내부 (출처 thehenryford)

1901년 포드는 자동차 경주로 얻은 이익으로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명도 자신의 이름을 따라 헨리 포드 컴퍼니(Henry Ford Company)로 지었다. 이때는 엔지니어가 아닌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포드는 늘 공장을 찾아 자동차의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포드가 만든 경주차 ‘포드 999’의 성능은 우수했다. 성적도 좋았다.

1902년에 헨리 포드가 제작한 포드 999 경주차 (출처 Flickr)

다만 그의 기술적 완벽주의는 여전히 비즈니스의 장애물이었다. 수개월 동안 투자자들은 완성된 자동차를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포드는 검토를 주장하며 최종 설계안조차 결정하지 못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결국 주주와 이사들은 포드를 해임했다. 그들은 지체 없이 회사명을 캐딜락 자동차 회사(Cadillac Motor Company)로 바꿔 버렸다. 혹자는 캐딜락의 역사적 시작은 ‘헨리 포드의 완벽주의가 부른 실패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1903년에 만들어진 포드 모델 A 초기 버전 (출처 wikimedia commons)

1903년 포드의 세 번째 회사인 ‘포드 자동차 회사(Ford Motor Company)’가 탄생했다. 당시 대중과 언론은 곧 망할 회사라고 여겼다. 이때 포드는 기존 테일러 주의적 노동 관리방식을 기술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릴 생산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중산층 서민을 위한 합리적 차인 모델 T(Model T)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모델 A가 1년간 발매됐다.

| 제임스 J. 쿠젠스의 등장

1906년, 제임스 J. 쿠젠스(James J. Couzens, 이하 쿠젠스)가 포드 자동차 회사의 부사장 겸 총책임자로 취임했다. 그 당시 포드가 내놓은 모델은 엔진 과열과 브레이크 파열이라는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포드는 이런 품질로 자동차를 판매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때마다 쿠젠스는 포드에게 다가가 “출고하지 않으면 회사는 파산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1908년형 포드 T의 합리적 가격과 높은 품질을 강조한 광고 (출처 Wikipedia)

포드의 열정을 쿠젠스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늑장 출고로 고객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차를 고객에게 인도한 후 문제점이 있다면 그때 개선하면 된다’는 묘안을 짜냈다. 이후 포드는 판매한 차에 문제가 생길 시 정비사를 보냈다. 수리 후 얻은 정보는 엔지니어링 팀에 보내져 생산 라인에 피드백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회사의 수익과 자동차의 품질 그리고 고용률은 높아만 갔다.

1910년 포드 자동차 회사 전경과 포드 직원들 (출처 iCulturalDiplomacy)

그뿐 만 아니었다. 쿠젠스가 만들어낸 새로운 판매 방식은 생산 라인 표준화를 가속했다. 또한 공정 분업화로도 이어졌다. 그 결과, 기존 방식으로 보통 13시간 걸리던 자동차 생산 공정이 약 93분으로 단축됐다. 생산증대 효과도 커졌다.

전 세계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준 포드 의 일관 생산 라인 방식 (출처 britannica)

포드의 생산량은 1910년 1만 9,000대에서 1913년 24만 8,000대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포드를 뺀 나머지 업체 전체가 만든 자동차 대수와 같을 정도였다. 이는 사업 파트너인 쿠젠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 포드와 쿠젠스의 메시지

만약 포드가 완벽주의만 고집했다면 산업의 혁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우리에게 요원한 것이 됐을지도 모른다. 특정 계층만을 위해 존재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헨리 포드는 완벽함을 추구해 실패를 두려워했다. 평화롭고 안전한 삶을 깨기 싫은 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1914년 디트로이트 신문에 함께 게재된 포드와 쿠젠스 (출처 thehenryford)

그런 포드를 일으켜 움직인 것은 쿠젠스였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미래로 가는 사람이라면 실패가 따르는 법이다. 라이트 형제도 1,000번의 크고 작은 비행 테스트에 실패했다. 우주로켓의 아버지인 로버트 고다드의 첫 로켓 성적은 12.5m였다. 실패보다 앞선 성공은 없다.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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