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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세상에 뛰어든 펀카 3대의 운명은?

박지웅 입력 2021. 12. 03.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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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불어 닥친 눈보라가 태백산맥을 집어삼키자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가을 풍경 대신 새하얀 겨울왕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산세가 점차 깊어질 때만 해도 강원도 대자연 속을 누비며 단풍 구경할 생각에 설레기만 했다. 이따금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날아다니는 가벼운 눈발도 이러다 멈추겠거니 웃어넘겼다. 

하지만 가을의 설렘도 잠시 산 중턱에서 줄지어 내려오는 제설차 무리를 만나자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제설차 앞부분에 달린 블레이드에 선명하게 묻은 눈 뭉치와 요란하게 울려대는 사이렌이 불안감을 더했다. 눈과 사투를 벌인 탓에 다크서클 짙게 드리운 제설차 기사의 지친 얼굴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저승사자 같았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렉서스 LC 500 컨버터블을 타고 뒤따라오는 동료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넘어왔다. 이번 여정을 얼마나 고대했는데, 여기서 포기하고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러기 싫었다. 사실 속으로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면 얼마나 나빠지겠냐는 안일한 생각도 했다.

단풍이 절정으로 무르익었을 이맘때 강원도 정선이야말로 와인딩은 물론 오픈 에어링과 오프로드 주행 모두를 즐길 수 있는 천혜의 장소라고 꼬드긴 끝에 두 동료는 휴가도 미루고 따라나섰다. 요즘은 자연흡기 엔진을 얹은 차를 이처럼 여러 대 모으기 힘드니까 흔치 않은 기회일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괜한 소리를 했다. 당장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머뭇거리는 동안 트립컴퓨터 실외 온도는 어는점 0도를 가리켰다. 당장은 제설차가 뿌리고 간 염화칼슘이 도로가 얼어붙는 것을 막겠지만, 목적지인 만항재(해발 1330m) 쉼터까지는 5km나 더 올라가야 했다.

해발 100m 올라갈 때마다 0.6도씩 낮아지기 때문에 이런 날씨에 취약한 포르쉐 911 GT3의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컵 2 타이어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파일럿 스포츠 컵 2 타이어는 마른 노면이라면 GT3이 뒷바퀴굴림 차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할 정도 접지력이 엄청나다. 뉘르부르크링 랩타입 6분 59초에 한몫한 우주적인 접지력의 파일럿 스포츠 컵 2 R 타이어는 옵션이다.

LC는 이미 접지력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아까부터 한 번씩 좌우로 흐르는 엉덩이를 카운터 스티어링으로 잡으며 힘겹게 따라왔다(그는 입은 웃는데, 눈은 울고 있는 이상한 표정이었다). 몸값 합이 4억원에 육박하는 GT3과 LC가 미끄러져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특히 하나뿐인 GT3 시승차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포르쉐 관계자를 볼 낯도 없어진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세상 마음 편한 이는 지프 글래디에이터를 타고 온 동료뿐이었다. 홀로 네바퀴굴림일 뿐만 아니라 오프로드 성능도 탁월해서 설사 지금보다 더한 악천후가 닥친다 해도 걱정 없었다.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통행하는 차가 뜸해졌다.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 다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을 넘어갈 엄두를 못 낼 터였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뒷바퀴굴림 못난이 둘이 눈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지경이 되면 구조의 손길은 영락없이 글래디에이터에 기대해야 판이었다.

어느새 주변은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뜻밖의 겨울왕국 방문은 계획에도 없던 일이었다. 이맘때 눈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계획대로라면 GT3이 성난 맹수처럼 구불구불 와인딩 도로를 질주하고, LC가 루프를 벗어던진 채 진한 가을 내음을 만끽하고, 글래디에이터가 거친 오프로드를 겁 없이 누비는 그림이어야 했다. 각기 장르가 다른 차 세 대가 동일한 장소에서 저마다의 특기로 운전을 즐기는 펀카 특집이었으니까. 

솔직히 데려온 삼총사 중 운전 재미는 글래디에이터가 가장 덜할 것 같았는데, 정말이지 세상사 새옹지마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글래디에이터 혼자만 재미 보게 될 줄이야. 결국 이 도전적인 시승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현재 상황이 폭설로 치달으면 GT3과 LC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 뻔하지만, 갑자기 눈이 내린 겨울철 도로 환경에서 섬머타이어 낀 뒷바퀴굴림 스포츠카가 돌발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경험할 좋은 기회였다.

물론 GT3으로 아예 마른 노면을 구경도 못 한 것은 아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를 넘나들며 그야말로 신나게 달렸다. 적당한 시점(터널 안이 최고다)에 킥다운으로 9000rpm까지 엔진을 채찍질하면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배기파이프가 울부짖는 소름 끼치는 귀곡성에 세상 걱정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GT3은 진정 고도로 설계한 쾌락주의의 결정체다. GT시리즈 911이라고 해서 주행 질감이 생각처럼 아주 단단하진 않다. 

GT3이 트랙 주행 성향이 강한 것은맞지만, 엄연히 일반도로(알다시피 노면이 항상 매끈하진 않다) 주행이 가능한 양산차여서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를 적당히 부드럽게 보정했다(곧 모습을 드러낼 GT3 RS는 인정사정없을 것이다).

911 중 최고라는 GT3의 해부하듯 날카롭게 베고 파고드는 코너링 실력은 몹쓸 날씨 때문에 끝끝내 제대로 경험할 수 없었다. 횡력이 커질수록 타이어 접지력을 극대화하는 911 RSR 레이스카의 더블위시본 프런트 서스펜션을 적용했다 한들 이날은 무용지물이었다. 

내구레이스에서 다진 기술로 만든 6기통 4.0L 박서 엔진(최고출력 510마력, 최대토크 48kg·m)과 기가 막히게 빠른 7단 PDK 변속기의 압도적인 매력을 충분히 느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LC를 탄 동료는 오픈 에어링만큼은 원 없이 즐겼다. 오랜만에 오픈카를 탄다며 출발 전부터 들떠있던 그는 중간중간 눈발이 심해질 때만 빼면 시종일관 루프를 접고 다녔다(여닫는데 각각 15초, 16초 걸린다. 시속 50km 이하 이동 중에도 작동한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얼굴에 추운 기색 하나 없었다. 영리한 오픈 에어 컨트롤이 루프 개폐 상태와 바깥 온도에 따라 공조기를 알아서 제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목에 따뜻한 에어 스카프를 둘러주는 넥 송풍구 덕분에 섭씨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혹한기가 아니라면 웬만한 겨울철 날씨에도 안락한 오픈톱 주행이 가능하다. 자연흡기 엔진은 고회전 영역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법이다. 

LC의 V8 5.0L 엔진은 4000rpm만 넘어서도 고운 숨결이 귀를 즐겁게 했다. 단조 커넥팅로드와 티타늄 흡·배기 밸브로 구성한 엔진은 7000rpm을 넘나들며 레드존 부근을 맴도는 동안 지치는 기색 하나 없이 오로지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미로운 배기음을 뽐냈다(실내에서는 사운드 제네레이터가 한층 더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 

비록 터널에서는 GT3의 괴성에 묻히기 일쑤였지만, 주변 풍경을 눈에 담으며 오픈 에어링 감성을 극대화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뻥 뚫린 고속도로에서 LC가 힘차게 GT3의 꼬리를 물기도 했다. 10단 자동변속기가 최고출력 477마력, 최대토크 55.1kg·m를 노면에 쏟으며 달려오는 기세가 제법 대단했다. 

하지만 제로백에서 나는 1.2초 차이는 거짓말을 안 한다. GT3은 스로틀을 힘껏 열자 폭격기처럼 맹렬하게 내달리며 LC와 거리를 한참 벌렸다. 늠름한 글래디에이터를 앞세워 마침내 만항재 정상에 다다랐다.

아스팔트가 곱게 깔린 도로는 끝났다. GT3과 LC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다시 미끄러운 길을 내려가거나 오프로드로 탐험을 떠나는 글래디에이터를 따라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직접 몰아 따라가자니 차체가 낮은 이들이 걱정됐다. 잘못했다간 범퍼 없이 돌아오는 수가 있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완만한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고 해도 거북이처럼 느릴 것이 뻔했다. 안전하게 주차한 뒤 글래디에이터에 몸을 실었다. 글래디에이터의 공간성은 흠잡을 데가 없다. 성인 남자 4명을 태워도 여유가 넘쳤고, 1005L나 하는 트렁크는 그 많은 촬영 장비를 다 삼키고도 한참 남았다. 

산속 깊숙이 들어오자 눈꽃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경관에 주위를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다. 경치 구경도 잠시 운전을 맡은 동료는 무슨 배짱인지 네바퀴굴림 SUV라도 두려움에 떨 험로에서 거침없이 차를 몰았다. 눈이 수북이 쌓여 길인지도 분간이 쉽지 않은 곳인지라 우리 나머지 얼굴이 사색이 될 정도였다. 

그는 모래 언덕 위에서도 고속 주행이 가능한 오프로드 플러스 모드로 두었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안심시켰다. 확실히 글래디에이터는 랭글러보다 오프로드를 요리하는 솜씨가 나았다. 이날처럼 마찰이 극히 적은 악조건이라 할지라도 다나 M210 와이드 프런트 액슬과 다나 M220 와이드 리어 액슬을 포함한 4:1 락-트랙 HD 풀타임 네바퀴굴림 시스템을 갖춘 글래디에이터가 일관되고 듬직한 접지력을 발휘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쿵’하는 소리와 함께 서스펜션이 뭔가를 세게 쳤다. 순간 머릿속은 ‘이젠 우린 끝났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뭔가 일어나도 단단히 일어났다고 여길 정도의 강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글래디에이터는 너무 멀쩡했다. 다행히 놀란 나머지 기세등등한 동료의 질주 본능은 한풀 꺾인 듯했다.

이번 여정을 소화하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눈 내리는 영하의 날씨에 뒷바퀴굴림 스포츠카를 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을 올랐다고 하면 도전적인 정신을 높게 사기보다 정신 나갔다고 말하는 이가 많을 터다. 하지만 어쨌든 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글래디에이터는 이번 여정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진정한 오프로드 펀카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섬머타이어는 생각보다 눈길에서 피도 눈물도 없지는 않았다. 

GT3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잘 안다. 기대했던 속도감 있는 주행을 못다 해 개인적으로도 아쉬웠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코너링의 마법사를 몰 기회가 또 오지 않을까?

박지웅 사진 이영석, SUGAR P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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