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드라이빙 메모리 (9) - 한국이민에 실패한 영국산 이그조틱카, 쌍용 칼리스타

조회수 2021. 9. 1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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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의 ‘갑툭튀’

현재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자동차 선진국 그룹에 들어섰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동차 역사는 세계자동차 역사와 비교하면 짧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산업적 측면에서의 위상과는 대비되어 자동차문화 혹은 자동차 생활화 등의 측면에서는 여타 자동차 선진국그룹에 비해 처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국산차의 단순한 차종 구성이 그중 하나다. 급속한 모터리제이션을 거치면서 세단 중심의 단순시장으로 세계무대에 나섰던 1980~90년는 특히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스포츠카’라는 존재가 국산차에 출현할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산 스포츠카가 등장했다. 1991년 12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태어난 칼리스타(Kallist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국산차 역사에서 1990년 등장한 현대 스쿠프가 첫 국산 스포츠카라는 국뽕스런 주장도 있지만 엄밀히 스쿠프는 소형 쿠페일 뿐이었다.

| 한국으로의 긴 여정 그리고 실패한 상륙

78대라는 공식적인 생산 대수를 기록한 칼리스타는 사실 성공작은 아니었다. 칼리스타의 출발은 19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였다. 1972년 로버트 잔켈(Robert Jankel)이 영국 서리주(Surrey州) 웨이브릿지(Weybridge)에 세운 팬더 웨스트윈즈(Panther Westwinds)라는 백야드빌더로부터 출발한다.

재규어 SS100의 레플리카였던 J72로 성공을 거두었던 팬더 웨스트윈즈는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1930년대의 2인승 로드스터 스타일링을 연상시키는 레트로 디자인의 리마(Lima)를 내놓아 성공을 이어가는 듯했지만 레이저(Lazer), 드 빌(De Ville), 리오(Rio), 식스(Six) 등 다양한 그러나 제대로 팔리지 않는 모델들을 내놓으며 적자를 쌓아가다 1979년 파산하게 된다.

쌍용 칼리스타의 원형격인 팬더 리마

그때 영 킴(Young C Kim : 김영철 현 가야미디어 회장)이란 한국인을 통해 팬더 웨스트윈즈는 회생하게 된다. 회사인수와 고용승계를 통해 잔켈이 동갑내기 한국인 경영자 아래서 개발한 새로운 모델이 바로 칼리스타다. 사실 리마와 칼리스타는 외관상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레트로 디자인의 스타일링은 거의 같다. 복스홀의 드라이브 트레인을 쓰던 리마와는 달리 포드의 파워플랜트를 쓰고 승하차의 편의성을 높이려는 영 킴의 의도를 받아들여 약간 커진 차체를 얹어 좀 더 현대적(?)으로 다듬어진 소형 후륜구동 로드스터였다.

칼리스타는 성공작이었다. 소규모 영국 백야드 빌더 중에서는 연산 100대 단위의 회사가 거의 없던 시절, 팬더는 연산 800대 수준의 대규모 백야드 빌더였다. 미국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영 킴은 칼리스타를 뒤이을 새로운 현대적 미드십 스포츠카인 EM25(후에 솔로)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엄청난 자금압박에 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

영 킴은 친분이 있던 쌍용 김석원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동아자동차를 인수해 쌍용자동차를 출범시킨 김석원회장이 팬더의 주식 80%를 인수하며 쌍용의 품에 자리잡게 되었다. 쌍용은 생산효율이 낮은 영국 생산을 접고 국내생산을 시작했다. 카뷰레터 방식의 1.6L 4기통 엔진과 2.8L V6 엔진을 2.0L DOHC 엔진과 2.9L 연료분사식 엔진으로 개선한 칼리스타는 ‘쌍용 칼리스타’로 내수시장에 등장했다.

하지만 칼리스타의 한국 판매기록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2인승 로드스터라는 존재를, 더구나 1930년대 영국 스포츠카 스타일링을 가진 칼리스타는 소비자들의 눈에 ‘별난 차’일 뿐이었다. 3천 만원이 넘는 찻값 또한 큰 장벽이었다. 당시 현대 쏘나타 3대 값에 육박하는 칼리스타를 받아들일 시장이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3년 동안 32대만 판매되는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다.

| 클래식카 아닌 클래식카 같은 스포츠카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칼리스타는 분명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어진 레트로 스타일 로드스터의 대표격인 존재였다. 하지만 한계 역시 뚜렷했다. 모건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지도 못했고 로터스에 뿌리를 둔 케이터햄과 같은 스포츠성도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영국의 스포츠 로드스터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었던 시장에서 칼리스타는 눈요깃거리 이외의 의미도 없는 비싸고 특이한 국산차였다.

1998년, 한 여배우가 타던 칼리스타 2.0을 인수했다. 5년 가까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차여서 거의 반값에 인수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엔진과 변속기의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차를 인수하자마자 손보는 것이 공식이겠지만 필자는 인수한 날 곧바로 1박 2일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책에서만 보았던 영국 스포츠 로드스터의 맛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기대가 컸다. 유럽시장에서 잘나가는 레트로 스포츠카를 더욱 개선한 차였으니까.

1986년형 팬더 칼리스타 ((cRM Sotherby’s)

운전석에 올랐다. 여느 1930~40년대 영국 로드스터보다 타고 내리기에 편한 큰 도어다. 문을 닫자 FRP차체 특유의 어색한 소리가 울린다. 차에 오르자 최고급 모델인 골드 트림답게 대시보드는 호두나무로 덧대어 있고 크롬 링에 감싸인 계기반과 마호가니 림의 나르디 스티어링 휠이 눈길을 끈다. 푸근한 가죽시트에 올랐다. 보통 소형 로드스터에 달리는 얄팍한 시트가 아니다. 고급스럽기까지 하다.

창문을 내렸다. 수동방식이어서 레귤레이터를 돌리다 집게손가락이 멋진 호두나무 대시보드에 걸렸다. 아팠다. 그제야 인체공학은 전혀 고려치 않은 1930년대 차의 레이아웃임을 깨달았다. 시동을 걸었다. 배기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뚜껑을 열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포드의 승용엔진을 얹었으니 배기음에 대해서는 관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달렸다. 그러나 2.0𝓁 DOHC엔진에 4단 자동변속기가 더해진 칼리스타는 30대 중반의 젊은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긴 후드 안에 놓인 작은 엔진은 FR이라는 기본 구성에 더해 프런트 미드십이라는 이상적인 배치를 만들었다. 비록 자동변속기이긴 하나 1,000kg에 못미치는 차체에 118마력이라는 출력이라면 스포츠카로서의 성능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품게 했다.

하지만 칼리스타는 화창한 주말에 노신사 혹은 노부부가 느긋하게 드라이브를 즐길 때 어울리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먼저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를 일주하며 마주치는 와인딩 코스에서도 스포츠 로드스터다운 모습은 없었다. 핸들링 반응에서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풀 드로틀로 무리하게 급코너에 뛰어들어 보았다. 급작스런 오버스티어가 나타난다. 그것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결국 1박 2일의 드라이브 여행계획은 강화도 일주로 접기로 했다. 그리고 보름 만에 칼리스타를 넘겨버렸다.

Chu via Wikimedia Commons, CC BY 4.0

| 사족 (蛇足)

칼리스타는 모건에서 느낄 수 있는 1930년대 영국 로드스터의 맛과 향이 없었다. 그렇다고 로터스 7 혹은 케이터햄 7에서 느낄 수 있는 스포츠성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이름처럼 ‘작고 아름다운 차’인 것은 사실이었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칼리스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칼리스타에 담겼던 한국인 청년의 열정과 새로운 분야에 과감하게 뛰어든 쌍용차의 멋진 무모함을 기억하지 못했는지, 당시 그 열정과 무모함을 느꼈더라면 단 두 주 만에 그리 매몰차게 내치지 않고 보듬어 주었을텐데.....

한장현 (자동차 칼럼니스트, 대덕대학교 자동차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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