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리 역사의 아이콘들 (1) - 란치아 델타 HF

조회수 2021. 10. 1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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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상 가장 성공한 랠리카

모터스포츠의 불모지 한국에서 태어나 세계 정상에 오른 존재가 있다. 랠리계 최고봉 WRC에서 두 번의 매뉴팩처러즈 타이틀을 차지한 현대다. 국내에서는 모터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워낙 낮은 탓에 큰 화제가 되지 못했지만 대단한 결과이자 업적임에 틀림없다. F1, 르망처럼 잘 닦여진 코스를 달리는 서킷 레이스와 달리 랠리는 양산차를 사용해 포장 혹은 비포장 도로를 달린다는 점이 특징. WRC 챔피언이라면 K-팝, K-무비에 결코 못지않은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랠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인지상정. 역사상 가장 성공한 랠리카, 란치아 델타 HF를 그 중 1번 타자로 꼽아보았다.

눈에 익은 주지아로 디자인

1979년에 출시된 란치아 델타 기본 모델

이 차를 보고 ‘어쩐지 아이오닉5랑 닮았는데?’라고 생각했다면 정답이다. 현대 아이오닉5와 란치아 델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탈리아 출신의 전설적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만나게 된다. 아이오닉5가 현대의 시발점인 포니에서 영감을 얻었음은 잘 알려진 이야기. 비슷한 시기(포니가 4년 정도 형님이다)에 같은 디자이너가 그린 델타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듯 단순한 2박스 보디는 당시 주지아로 디자인의 전형과도 같다.

1979년 등장한 델타는 이듬해 ‘유럽 올해의 차’에 선정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델타의 성공은 시장에 한정되지 않았다. 기본형은 1.3L와 1.5L 엔진으로 앞바퀴를 굴리는 평범한 해치백이었지만 1982년에 1.6L 터보 엔진으로 네 바퀴를 굴리는 델타 터보 4×4 프로토타입을 공개하며 고성능 버전의 등장을 예고했다.

1980년대 초반 란치아의 그룹 B 랠리 경주차였던 랠리 037

당시 WRC에서 란치아의 랠리카는 랠리 037이라는 미드십 뒷바퀴 굴림 모델. 그런데 신기술인 4WD의 폭풍이 너무나 거세었기 때문에 1985년에는 아바르트(Abarth)와 협력해 델타 S4라는 신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델타 S4는 이름만 델타지 양산형과는 전혀 무관한 랠리 전용 모델이었다. 82년 시작된 WRC의 그룹B 규정에서는 12개월 동안 200대만 생산하면 랠리카로 인증을 받을 수 있었기에 강관 프레임에 복합소재 보디를 씌운 미드십 괴물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룹A 도입이라는 행운

고성능의 그룹B는 화끈한 볼거리를 제공한 반면 지나친 출력 경쟁으로 사고가 속출해 1986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만다. 그런데 1987년 도입된 그룹A 규정은 필요한 생산대수가 크게 늘어나 참가 메이커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반면 란치아는 신무기인 델타 HF 4WD를 빠르게 준비해 1986년에 이미 양산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터보 엔진은 테마(Theme Turbo), 4WD 시스템은 델타의 세단형인 프리즈마(Prisma 4WD)를 통해 이미 양산 중이었기 때문이다.

란치아 델타 HF 4WD

200대만 만들면 되는 그룹B 시대와 달리 연간 5천 대는 양산차의 영역이다. 델타 HF 4WD는 원래 랠리 참가를 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갑작스런 변화가 우연찮게 딱 맞아 떨어지며 란치아에게는 큰 행운이 되었다.

1987년 개막전 몬테카를로 랠리 원투 피니시를 시작으로 란치아는 11전 7승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그 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1992년까지 독주는 계속된다. 6연속 컨스트럭터즈 챔피언은 물론 같은 시기 유하 칸쿠넨과 미키 비아시온이 각기 2번씩 드라이버즈 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WRC는 말 그대로 란치아 델타의 독무대였다.

WRC에서 대성공을 이루다

1988년 WRC 아크로폴리스 랠리에서 달리고 있는 란치아 델타 랠리카

대활약을 등에 업고 델타 HF 역시 다양한 버전으로 발전했다. 1988년 등장한 델타 HF 인테그랄레는 오버 펜더 덕분에 외모가 근육질로 바뀌었고, 이듬해에는 2.0L DOHC 터보 200마력 엔진을 얹은 인테그랄레 16v가 나왔다.

델타 HF 인테그랄레 에볼루치오네(1992)는 2.0L DOHC 터보 엔진의 출력을 210마력까지 끌어올리고 오버펜더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한편 랠리카로의 개조를 고려한 각종 개선작업이 이루어졌다. 93년의 에볼루치오네Ⅱ는 새로운 엔진 제어 시스템과 3원촉매장치, 가레트 터보를 달아 출력을 215마력으로 높였다. 하지만 랠리에 투입된 차는 에볼루치오네Ⅱ가 마지막이었다.

93년 2세대로 진화한 델타는 I.DE.A가 담당한 디자인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WRC 퇴진에 따라 신형 HF 버전 역시 더 이상 네바퀴 굴림이 아니었다.

1993년에 나온 2세대 델타 2.0 HF. WRC 철수 이후 다시 평범한 승용차가 되었다

그래도 6년에 걸쳐 46번의 우승과 6연속 챔피언 타이틀 획득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결과였다. 이런 인기 덕에 1세대 델타는 최종 진화형인 에볼루치오네Ⅱ 이후로도 지알라, 블루 라고스, 콜레치오네, 지알로 페라리같은 스페셜 한정판이 여럿 만들어졌다.

희소성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아트 회장 지안니 아넬리(당시 란치아 모기업)의 주문에 따라 제작된 델타 스파이더 인테그랄레다. 델타 인테그랄레 유일의 2도어 컨버터블형. 그밖에 에볼루치오네Ⅱ의 위탁생산을 담당했던 코치빌더 마지오라가 에볼루치오네Ⅲ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란치아가 거부함에 따라 비올라라는 이름의 프로토타입 1대로 끝나고 말았다.

영광의 시대는 지나가고

1세대 델타 HF의 최종 버전. 그릴에 달린 HF 로고에는 빨간색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코끼리가 그려진 노란색 HF 로고는 BMW M, 아우디 RS처럼 고성능 란치아를 상징한다. 델타는 HF가 붙은 두 번째 란치아. 첫 번째는 60년대 중반 랠리에서 대활약했던 풀비아 HF였다. HF(High Fidelity)는 오디오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란치아는 필터링이나 왜곡 없이 도로의 모든 감각을 운전자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로 이 명칭을 사용했다.

역시나 고성능과 다소 동떨어진 코끼리 그림은 2대 사장인 지안니 란치아의 제안이었다고 전해진다.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코끼리는 빠르거나 민첩하지는 않아도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룹A 시대 WRC에서 란치아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야생 코끼리 같은 존재였다.

랠리 무대에서 란치아의 이름을 빛낸 마지막 경주차, 델타 HF 인테그랄레 에보

빛나는 델타 HF와 란치아의 영광도 이제는 과거 속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월드랠리카 규정은 어떤 자동차든 랠리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소형 4WD 터보 모델이 필요치 않다. 게다가 란치아 브랜드 자체도 모기업이 FCA에서 스텔란티스 그룹으로 재편되는 등 순탄치 않은 상황. 한때 피아트 그룹 내에서 고급차와 모터스포츠를 도맡았던 란치아는 멋지고 잘 달리는 이탈리아 자동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는 소형차 입실론을 이탈리아에서만 판매는 신세가 되었다.

랠리 스테이지를 호령하던 란치아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브랜드만 살아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랜만에 르망에 복귀해 단번에 3연승을 거머쥔 포르쉐를 바라보며 란치아의 WRC 복귀에 대한 달콤한 환상에 빠져보았다. 그 경쟁 상태가 현대라면 감회가 더욱 남다를 것이다.

| 글 이수진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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