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한 대우, 누비라를 비롯한 신차를 쏟아내다

조회수 2020. 1. 27. 13:20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폐허에서 희망을 일군, 대우자동차 브랜드 히스토리(6)

1992년 1월, 대우차는 GM과의 관계를 청산한다. GM 지분 50%를 모조리 흡수하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런데 양날의 검이었다. GM 입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대신 세계 판매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멀리 내다볼 때 GM 아래에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에스페로를 개발하며 자체 기술의 필요성을 사무치게 느꼈다.



대우차는 즉시 움직였다. 1992년 부평 기술연구소에 충돌시험장과 엔진시험실 등을 지어 개발역량을 키웠고, 자체 디자인 개발을 위한 디자인포럼을 만들었다. 고등기술연구원도 이때 설립한다. 내실을 다진 대우는 해외로 손을 뻗친다. 1994년 벤틀리, 포드와 함께 신차 개발을 도맡았던 영국 IDA(International Automotive Design)를 인수해 대우 워딩테크니컬센터를 출범시킨다. 이어 1995년엔 독일 뮌헨에 독일기술연구소를 세운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숙적 현대차는 스쿠프, 엘란트라, 아반떼 등을 연이어 출시하며 앞서가고 있었다. 대우차는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갓 기술역량을 갖춘 연구소에서 소형과 준중형, 중형 등 세 가지 체급의 세단을 동시에 개발했다. 걸음마 떼기도 전에 달리는 격이었다.



내부에서는 “미친 짓”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세 개 차종 동시 개발계획은 순항했다. 부평과 워딩, 뮌헨 등 3개국 연구소에서 경쟁을 벌이며 속도를 높였다.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시너지 효과도 챙겼다. 대우는 여기에 부품 공급업체가 개발에 참여하는 ‘게스트 엔지니어링 기법’까지 활용하며 가속을 더했다. 그 결과 대우 전성기를 열었던 삼총사인 라노스와 누비라, 레간자가 등장한다.




세계 10대 거대 자동차 제조사를 꿈꾸다

그 무렵 대우차는 세계경영을 꿈꾸고 있었다. 독자모델 개발과 해외 연구소 설립도 세계경영 전략의 시작점이었다. 시기도 좋았다. 소련 해체와 함께 동유럽 국가 및 동남아시아가 신흥시장으로 떠올랐다. 대우차는 현지에 공장을 세우거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세계경영 행보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GM과도 맞붙었다. 과거 합작관계였던 두 회사가 경쟁사로 다시 만난 셈이다. 대우는 1995년 폴란드 국영자동차회사 FSO 인수전, 1997년 우크라이나 국영자동차회사 인수전에서 연달아 GM의 콧대를 누른다. 세계 자동차 업계는 떠오르는 대우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대우차 행보에 “한국에서 또 하나의 토요타가 등장했다”고 평가했다.



안방에서도 대우차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다. 1998년 1월 쌍용자동차를 손에 넣으면서 대우차엔 없던 SUV 라인업을 보완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특히 대우차의 쌍용차 인수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었다. 과거 신진그룹이 무너지며 나뉘었던 신진지프자동차와 신진자동차가 대우그룹 품 안에서 하나로 뭉친 계기였다.



대우자동차는 쌍용차를 받아들여 국내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어 판매량으로 현대차를 앞지른다. 승용차 기준으로, 1998년 상반기 9만3,306대를 판매해 8만4,381대를 판매한 현대차를 8,900여 대 가량 차이로 앞섰다. 국내 시장 점유율은 대우 44%, 현대 40%. 대우차 출범 이후 최초의 승리였다. 대우차는 세계 10대 종합 자동차 브랜드의 꿈에 다가서고 있었다.(7부에서 계속)


글/윤지수(로드테스트 기자) 사진/쉐보레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