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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끼 할까요?

조회수 2020. 5. 2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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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한 끼를 먹기 위해 벤테이가와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스무 살 때 나만의 공간을 구하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방을 보러 다녔다.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햇빛이 들지 않아서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쌌다. 어찌 됐건, 강원도 춘천에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자취방을 구했다. 온전히 나를 위한 공간인 만큼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몄다(지금 생각하면 사실 꾸밀 정도로 넓은 공간도 아니었다). 그 후로 몇 번 더 이사를 다녔다. 정말이지 이사는 너무도 힘들다. 집 없는 설움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죽어도 공감하지 못할 터다.

두 번째 이사를 갔을 때였던 듯하다. 혼자 쓸쓸히 저녁을 먹으면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을 처음 봤다. 배우 최불암이 지역 대표 음식들의 숨겨진 이야기, 역사, 그리고 음식 문화 등을 직접 다니면서 알아보고 경험하는 ‘푸드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예능처럼 웃기거나 드라마처럼 몰입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편안하게 볼 수 있어서 지금까지도 즐겨 보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최불암 아저씨처럼 미식 여행을 다녀봐야지.”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긴 버킷리스트다. 성인이 된 후로 줄곧 혼자 살다 보니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1%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했겠지만 음식이다. 아무리 비싼 밥을 사 먹어도 어딘가 아쉽다. 인터넷에 나온 조리법을 따라 직접 만들어 먹어봐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서 밤잠을 설친 적도 있다(밥을 적게 먹어서가 아니다).

버킷리스트에 오래도록 올려두었던 미션을 서른이 넘어서야 도전하게 됐다. 꿈을 이뤘다고나 해야 할까? 이제부터는 내가 한국인의 밥상 PD 이자 최불암 아저씨가 되는 것이다. 일단 내용을 조금 수정했다. 단순히 지역 대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직접 식재료를 구해 요리해 먹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엄청난 불행이 닥칠지 몰랐다). 굳이 사서 고생을 왜 하냐고? 재미있잖아!

일단 지역부터 정해야 했다. 대한민국 지도를 펼치고 한참을 고민했다. 남쪽으로 갈까 아니면 서쪽으로 갈까…. 고심 끝에 고른 목적지는 강원도. 개인적으로 강원도를 정말 사랑한다. 강원도 철원에 본가가 있는 터라 초·중·고등학교를 철원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학교는 강원도 춘천에서 다녔다. 오죽하면 스스로 ‘어머니가 낳고 강원도가 키운 남자’라고 별명을 붙였을까.

자, 그럼 이제 파트너를 고를 시간이다. 낮고 빠른 차를 타고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느껴볼까도 생각했지만, 가져갈 짐이 많아서 탈락시켰다. 편안한 플래그십 세단은 어떨까? 혹여나 만날 수 있는 험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아 패스. 답은 SUV다. 단, 조건이 있었다. 스포츠 쿠페 뺨치는 성능도 있어야 하고, 오프로드를 넘나들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그리고 멀리 달려가야 하니 무엇보다 편해야 했다.

출발 전날, 서울 청담동 벤틀리 전시장에서 여정을 함께할 동반자, 벤테이가를 만났다. 열쇠를 받기 전, 시승신청서를 꼼꼼히 읽어보던 중 한 문장이 꽤 무섭게 들렸다. ‘고가의 차량인 만큼 안전한 주행을 부탁드립니다.’ 3억원에 가까운 자동차니 당연한 소리다. 고장이 생기면 금액도 금액이지만 영국에서 부품이 건너와야 해서 시간도 꽤나 걸린다고 한다. 시승 주의사항을 마음에 새기며 열쇠를 받아 들었다. 부디 이번 여정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잠깐 벤틀리 이야기를 해보자. 벤틀리의 역사는 벌써 100년이 넘었다. 1919년 월터 오웬 벤틀리는 “빠른 차, 좋은 차, 동급 최고의 차”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벤틀리 모터스를 설립했다. 월터 오웬은 열정이 가득한 엔지니어였다. 1900년대 차는 위험하고 시끄럽고 정교하지 못하다고 무시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그의 성격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엄청난 기대치를 만족하는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주변인들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번 여정을 함께한 벤테이가는 벤틀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W12 6.0L 심장 대신 V8 4.0L 가솔린에 트윈 스크롤 터보를 물린 엔진을 품고 있다. 실망할 필요는 없다. V8 엔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상 경력이 있을 정도다. 성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얌전히 달릴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0.02초 만에 작동된다) 실린더 4개를 잠재우고 신호에 걸려 멈춰있으면 시동을 끄기 때문에 기름을 들이키는 양이 그리 많지 않다. 장거리 여행에는 정말이지 고마운 기능이다.

벤틀리답게 SUV 구석구석을 섬세하고 고급스럽게 잘 꾸몄다. 벤틀리의 상징인 4개의 원형 헤드램프와 커다란 매트릭스 그릴 등 브랜드 디자인 DNA가 잘 드러난다. 그리고 후면에는 트윈 쿼드 배기 파이프도 달았다. 시승차에는 100주년 기념 스펙도 적용됐다. 보닛·트렁크·휠에 100주년을 기념하는 엠블럼을 달았고, 그 속에는 벤틀리의 설립연도인 ‘1919’와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9’가 새겨져 있다.

드디어 여정 당일이다. 해도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움직였다. 사진작가와 동료 기자도 데리러 가야 하기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면 출퇴근 정체에 가로막혀 별이 쏟아지는 자정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도로 정체는 피했고, 사진작가와 동료 기자를 태우고 강원도 횡성과 평창 경계에 있는 태기산 정상으로 달렸다.

이곳을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건 철저하게 TV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진행자 김영철의 말에 따른 것이다. “강원도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어머니가 낳고 강원도가 기른 남자가 듣기에 정말이지 기가 막힌 말이었다.

서울에서 평창까지 2시간 정도 달렸지만, 오히려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벤테이가는 어떤 상황에서도 촐싹거리지 않았다. 벤틀리 모드를 이용하면 차 스스로 운전 성향을 분석해 최적의 조건으로 모든 설정을 바꾼다. 덕분에 서스펜션은 부드럽게 충격을 집어삼켰고, 엔진도 얌전히 피스톤을 움직였다. 또 48V 시스템을 활용하는 세계 최초의 전자식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인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와 첨단 멀티 모드 트랙션 제어 등을 통해 뛰어난 승차감을 완성했다. 매끄러운 가죽을 덮은 시트에는 안마 기능까지 있었다(이 편안함을 독차지하기 위해 함께한 동료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2시간 정도 달리자, 태기산 입구에 다다랐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해발 1261m를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시승신청서에 있던 주의사항이 떠올랐다. ‘고가의 차량인 만큼 안전한 주행을 부탁드립니다.’ 물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벤테이가는 무늬만 SUV가 아닌 진짜 SUV다.

다이얼을 돌려 자갈길 모드로 바꿨다. 혹여 돌부리에 걸리지 않을까 서스펜션에 바람을 넣어 차체를 들어 올렸다. 벤틀리는 진짜 SUV 를 만들기 위해 올 터레인 스펙을 넣었다. 노면 상태에 따라 눈길·풀밭· 흙길·자갈길·진흙길·모래언덕 등 다양한 모드를 선택할 수 있다. 차체를 보호하기 위해 서스펜션도 네 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 덕분에 무사히 정상에 올라 촬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역시 강원도를 제대로 느끼려면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봐야 하나 보다. 내려오는 과정에서는 안전을 위해 내리막 주행 제어 장치를 이용했다. 이 기능은 시속 20~30km 사이 속도를 설정할 수 있고, 5% 이상의 경사에서 작동한다.

무사히 태기산 정상에서 내려온 우리는 강릉으로 출발했다.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닌데 시간이 꽤 많이 흘렀다. 주행 모드를 스포츠로 바꾸고 가속 페달을 밟아 8개의 피스톤에게 연주 시작을 지시했다. 벤테이가는 550마력, 78.5kg·m의 힘을 쏟아내면서 순식간에 속도를 높였다. 배기음이 귓 볼을 때렸다(스피커에서 나오는 가짜 사운드가 아닌 진짜 배기음이다).

모드를 바꾸자 엔진은 활기차게 움직였고, 서스펜션은 긴장하며 탄탄하게 노면을 움켜쥐었다. 변속기는 패들시프트를 딸깍거리기가 무섭게 기어를 바꿔 물었다. 태기산을 올랐던 그 벤테이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고속주행 안정감이 미치도록 뛰어나단 점이다. 속도계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번 여정 동안 6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렸고, 13시간 남짓 걸렸다. 아마 벤테이가를 하루에 이렇게 많이 움직인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제대로 경험했다는 얘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벤테이가는 최고의 장난감이자 최고의 여행 동반자다. 빌딩이 가득한 도심에서는 물론 험로도 가뿐하게 넘어갈 수 있다. 물론 3억원에 가까운 돈을 내야 얻을 수 있지만 돈이 아깝지는 않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강릉 날씨는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여정을 함께한 사진작가는 드론으로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에메랄드 빛 바다, 창자처럼 구불거리는 길, 벤테이가를 함께 찍을 작정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감탄을 하면서 다시 바퀴를 굴렸다. 애초에 계획했던 식재료는 아직 하나도 구하지 못했다.

한적한 항구에 차를 세우고 집에서 챙겨온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진짜 그걸 하려고?” 함께한 동료 기자가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아마 내가 진짜 낚시를 할 줄은 몰랐을 터다. 낚싯바늘에 먹음직스러운(?) 갯지렁이를 끼우고 물고기를 유혹했다. 그렇게 30분, 또 30분, 그리고 1시간. 얄미운 물고기는 한 마리도 바늘을 물지 않았다.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는 사진작가와 동료 기자 보기가 무척이나 낯부끄러웠다. 아무래도 물고기들 식사 시간이 아니었나 보다.

결국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계획했던 메뉴는 먹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째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싶었다. 재료를 구하지 못했다고 쫄쫄 굶을 수는 없다. 뭐라도 먹기 위해 캠핑 가방을 뒤져보았고, 사나이를 울린다는 라면 한 봉지를 찾았다. 버너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끓였다. 장정 3명이 라면 한 봉지라니…. 그렇지만 맛은 황홀 그 자체였다.

단언컨대 올해 먹었던 라면 가운데 가장 최고의 맛이었다. 할머니가 하신 말씀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시장이 반찬이다.” 역시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허인학 사진 이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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