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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사랑한 차, 폭스바겐 비틀

오토티비 입력 2018.12.10 10:37 수정 2018.12.10 10:5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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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간 2,150만 대 판매된 세계적인 국민차
전쟁광의 선전물에서 반전구호 외치는 히피족의 상징 되다

1930년대 독일의 자동차 보급률은 극히 낮았다. 아직도 자동차가 상류층 중심의 물건이던 탓에 일반 서민은 구입하기 어려웠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시 미국은 절반 가까운 가정에서 자가용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나치 독일을 이끈 히틀러는 자동차 보급화에 기여한 포드 모델 T 같은 국민차가 독일에도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1933년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에게 국민차 개발을 주문하며 몇 가지 조건을 내건다. 성인 두 명과 아이 세 명이 탑승한 채로 아우토반을 시속 100km로 달리면서 연료 소모는 주행거리 100km당 7L 이하일 것, 그리고 차 값이 1,000마르크를 넘지 않도록 주문한다. 마지막으로 공랭식 엔진을 탑재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즉 ‘이상적인 가족(성인 둘, 아이 셋)이 국민차를 타고 독일 민족의 기술과 우수함을 상징하는 아우토반 달린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통해 국민적 지지도 얻고 정권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여기서 말하는 이상적인 가족이란 중산층 복지 프로그램 KDF(기쁨 속에 솟아나는 힘이라는 뜻)가 구상한 개념이다.

독일 뤼겐섬의 해변 4.5km를 따라 지어진 KDF 리조트의 현재 모습

아이 셋을 둔 일반 가정이 주말마다 리조트를 가고, 대형 크루즈선을 타고 여행하며, 정권이 만든 KDF 라디오로 집에서 문화생활을 즐긴다는 게 이 캠페인의 목표였다. 실제로 나치 정권은 해변에 대규모 리조트를 건설하고 대형 크루즈를 여러 척 띄워 국민의 여가를 장려했다. 국민차 보급 역시 이러한 복지 정책 중 하나였다.

5마르크 우표를 한 번도 빠짐 없이 붙여야 차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1,000마르크를 넘지 않는 차 값도 당시 독일 가정 1년 평균 수입인 1,632마르크를 고려해 산정했다. 또한 국민이 보다 쉽게 살 수 있도록 주당 5마르크씩 4년간 990마르크를 모으면 차를 주는 적금 상품도 함께 만들었다. 한편 정권이 차의 엔진을 공랭식으로 규정한 것은 과거 형편없던 부동액 품질에서 비롯됐다.

1935년 비틀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 V1

당시에는 밤사이 냉각수가 쉽게 얼어버리는 탓에 운행이 끝난 차는 보통 냉각수를 빼놓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채워 넣기를 반복했다. 물론 부유한 가정에서는 차가 얼지 않도록 따로 마련한 차고에서 난방까지 했으나, 서민 가정에 이런 차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유지관리가 쉬운 공랭식 엔진을 얹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향후 러시아를 침공할 때 비틀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라는 소문도 전해지나 정확히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다.

1938년 5월 공개한 비틀 TYPE 1

그로부터 5년 뒤인 1938년 5월에 첫 번째 양산형 비틀 타입1이 완성된다. 최고출력 36마력의 4기통 수평대향 1.2L 공랭식 엔진과 4단 수동기어를 맞물려 최고시속 110km를 달릴 수 있었다. 차의 구조는 매우 간결했다. 앞뒤 서스펜션은 무거운 리프스프링을 대체한 토션바 설계를 도입했고, 공랭식 엔진으로 수랭식 라디에이터와 이에 따르는 주변 부품을 생략할 수 있었던 까닭에 건조중량이 가벼웠다.

포르쉐 박사는 히틀러의 주선으로 타트라 T570의 개발을 어깨너머로 지켜볼 수 있었다

뒤 차축에 엔진을 배치한 특징적인 구조는 타트라 T570을 참조했다. 폭스바겐은 이와 관련해 1961년 타트라에게 300만 마르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계획대로라면 이때부터 일반 가정에 보급할 국민차를 생산해야 했지만, 이듬해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서민의 모터리제이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퀴벨바겐

차를 사기 위해 한 푼씩 모은 돈은 전쟁자금으로 쓰였고 공장에서는 국민차가 아닌 군용차를 찍어냈다. 이때 생산한 군용차가 지금도 유명한 오프로더 퀴벨바겐과 수륙양용차 슈빔바겐이다. 비틀에 기반한 두 차는 지프와 함께 실제 전쟁터에서 자동차의 효용성을 입증한 초기 사례로 기록된다. 전쟁 동안 퀴벨바겐은 5만 2,000대, 슈빔바겐은 1만 4,000대가 생산되었다.

수륙양용 버전이었던 슈빔바겐(왼쪽)과 사륜구동 섀시 위에 비틀 차체를 얹은 TYPE 82E

비틀 타입1이 다시 생산된 건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다. 당시 독일을 점령한 영국군이 타입1의 우수한 설계를 알아보고 2만 대를 주문하면서 생산을 재개했다. 서민을 위한 비틀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후 북유럽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되면서 해를 거듭할수록 생산량이 늘었다.

마땅한 이름 없이 카데프바겐(KDF-Wagen, 카데프 자동차)으로 불렸던 타입1이 국민차라는 뜻의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개명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다. 우리에게 익숙한 비틀이라는 이름은 1958년 광고물에 처음 등장한 뒤, 1968년에 이르러서야 정식으로 붙여졌다.

비틀이 가장 집중했던 수출 국가는 당연히 미국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경제가 호황을 맞이하면서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선 크고 웅장한 8기통 차가 불티나게 팔렸지 비틀처럼 작은 소형차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비틀은 전범국가에서 만든 차가 아니던가? 1949년 첫 수출 이래 고전했던 폭스바겐은 독일 출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소형차의 유쾌함을 강조하는 광고 전략을 1958년부터 펼치며 판매를 늘리는 데 성공한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동원된 광고는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다

1960년대 들어 비틀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히피 문화가 새롭게 태동하게 된다. 바로 히피족의 탄생이다. 그리고 이들이 주목한 차가 바로 비틀과 비틀에 기반한 원박스카 ‘마이크로버스’였다. 히피족은 반전, 평화, 사랑과 관련된 구호를 외치며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비틀을 기반으로 만든 VW의 마이크로버스

그들은 또한 크고 기름을 많이 먹는 자동차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귀엽고 경제적인 소형차 비틀과 여럿이 함께 캠핑을 떠날 수 있는 마이크로버스는 자유롭고 낭만적인 히피 문화에 딱 맞는 자동차였다. 그렇게 두 차는 히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다. 물론 앞서 말한 신선한 광고 전략도 히피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타입1부터 1976년까지의 모델이 나란히 섰다

그 사이 비틀은 꾸준한 개량을 거듭한다. 1966년 엔진 배기량을 1.3L로 늘리고, 1967년에는 최고출력 52마력의 1.5L 엔진과 함께 스윙 액슬 리어 서스펜션을 탑재한다. 그리고 1971년에는 앞 서스펜션이 맥퍼슨 스트럿으로 바뀌었다. 

1953년부터 뒷유리가 한 장으로 바뀌었다

초창기 두 개로 나뉘었던 뒤쪽 유리는 면적이 넓은 한 장으로 교체되어 현대적인 외관으로 탈바꿈한다. 또한 크롬 도금을 입힌 범퍼와 도어 핸들, 크기를 축소한 헤드램프 등 소소한 변화를 주어 산뜻한 이미지를 더해갔다. 그에 따라 차 값도 꾸준히 올랐다. 1951년 1,295달러에서 시작해 1974년에는 2,625달러로 20년간 값이 두 배로 뛰었다.

앞바퀴굴림 방식의 현대적인 설계를 갖춘 소형 해치백 골프는 사실 비틀의 후속모델이었다

1974년에는 비틀의 뒤를 잇는 소형 해치백 골프가 등장한다. 앞바퀴굴림 방식을 채택한 현대적인 차체 구조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골프의 등장에도 비틀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들어 선진국을 중심으로 수요가 점차 감소하자 1978년 독일 공장에서 가장 먼저 단종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14개 국가에서는 조립이 이루어졌다. 마지막까지 생산을 이어갔던 곳은 멕시코였다. 1980년대부터 남미가 비틀의 최대 시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설계된 비틀을 오래도록 팔 수 있었던 데는 개발도상국 특유의 느슨한 환경규제와 안전규제가 한몫했다.

2003년 단종 기념 모델 울티마 에디션

또한 1989년 남미 시장에서 차 값을 낮추어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오랜 세월 생산하면서 이미 개발비를 충분히 뽑아낸 터라 가격을 낮추는 데 부담이 적었던 것이다. 물론 옛날 설계 그대로 팔았던 건 아니다. 환경오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1년에는 삼원 촉매를, 1993년에는 전자식 연료점화장치와 인젝터를 달아 최소한의 환경 기준을 맞춰 나갔다.

2003년 마지막으로 생산한 비틀이 라인을 빠져나오고 있다

비틀은 2003년 단종을 기념하는 울티마 에디션을 끝으로 65살 인생을 마감한다. 그간 생산한 대수는 총 2,150만 대. 여러모로 자동차 역사에 기념비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의 홍보수단으로 태어나 반전과 평화의 아이콘으로, 그리고 말년에는 서민의 소중한 자가용으로 살다 간 비틀. 아직도 멕시코와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국가에서는 여전히 고운 자태를 뽐내는 비틀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비틀의 또 다른 형제차, '카르만 기아'

카르만 기아(1955~1974년)

마이크로버스 외에도 비틀을 기반으로 만든 형제차가 하나 더 있다. 매력적인 스포츠 쿠페 카르만 기아다. 디자인은 이탈리아 카로체리아인 기아(Ghia)가 맡았고 생산은 비틀 카브리올레를 위탁 생산하던 카르만에서 담당했다. 이 차는 비틀의 두 배 값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 데뷔부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해 1974년 단종할 때까지 총 44만5,000대가 팔렸다. 마이크로버스와 카르만 기아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다양한 차종을 개발한 사례로 의미가 깊다.

뉴 비틀의 예고편, '컨셉트 원'

컨셉트 원(1994년)

1994년 북미국제오토쇼에 눈길을 끄는 컨셉트카가 하나 등장한다. 오리지널 비틀의 외관을 현대적으로 다듬은 ‘컨셉트 원’이 그 주인공.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레트로 디자인에 동조한 것으로, 대중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폭스바겐은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이듬해 컨셉트 원의 양산을 결정한다. 4세대 골프 플랫폼을 뼈대 삼아 완성된 차는 1997년 ‘뉴 비틀’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더 비틀 파이널 에디션

3세대에 해당하는 ‘더 비틀’이 내년 7월을 마지막으로 단종된다. 더 비틀 파이널 에디션은 이를 기념하는 스폐셜 모델로 미국에서만 판매된다. 외관은 2003년 1세대 단종 기념 모델 ‘울티마 에디션’에서 영감을 얻었다. 외관은 사파리 유니 베이지와 스톤워시 블루 등 두 가지 전용 컬러를 선택할 수 있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크롬 도금 17인치 휠도 마련했다. 실내는 퀼팅 패턴 베이지 가죽시트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파워트레인은 4기통 2.0L 터보 엔진과 6단 자동변속기가 짝을 이룬다.

 오토티비 편집팀 사진 폭스바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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