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냉정 사이①] 마세라티 르반떼 vs 포르쉐 카이엔

조회수 2018. 12. 18. 17: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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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라티와 포르쉐는 국적과 역사, 성향마저 뼛속까지 서로 다른 맞수다. 이 두 브랜드의 대표 차종을 8명의 남녀 필자가 짝을 이뤄 네 편의 에세이 형태로 소개한다. 남성은 마세라티의 열정, 여성은 포르쉐의 냉정에 초점을 맞춰 감상을 풀어낸다. 오늘은 그 첫 번째 편으로, 마세라티 르반떼와 포르쉐 카이엔의 상반된 매력을 다뤘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열정이 주는 희열

글 김형준(자동차 칼럼니스트) |사진 마세라티 

‘Maserati’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면 약 2억2,400만 개의 검색결과가 뜬다. 이 가운데 가장 크게 보이는 검색결과엔 이런 설명이 달려 있다. ‘레이싱용 자동차 제조업체.’ 하하, 대체 언제적 얘기람. 물론 꼭 근거 없는 사실은 아니다. 이 브랜드의 시작은 마세라티 성을 쓰는 형제들이 그랑프리 경주차 제작을 위해 이태리 볼로냐에서 문을 연 작업장이었으니까. 

마세라티 6CM
마세라티 250F

마세라티는 실제 레이싱 무대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세계대전 이전의 그랑프리에서 맹활약한 티포 26, 타르가 플로리오 경주 4연패에 빛나는 6CM과 4CL, 전설적 드라이버 후안 마누엘 판지오에게 1957년 F1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안겨준 250F 등은 초창기 레이싱 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당대의 스타플레이어들이었다. 

마세라티는 이후로도 꾸준히 레이싱 활동을 했다. 하지만 그때만큼 찬란히 빛나진 않았다. 1950년대 이후 마세라티 스토리는 오히려 A6G나 3500 GT, 기블리와 같은 아름답고 강력한 일반도로용 그랜드투어러(이후 GT, 이태리어로는 그란투리스모)가 빼곡히 채웠다. 살짝 과장하면 마세라티의 역사는 레이싱과 GT, 이 두 축이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제작하는 실제 제품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GT는 마세라티 브랜드의 중심인 동시에 정신인 셈이다. 현재 마세라티는 레이싱 전용 모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모든 마세라티 차종은 노골적으로 레이싱 감각을 드러낸다. 심지어 산짐승처럼 ‘한 덩치’ 하는 SUV인 르반떼에서조차. 

르반떼는 껍데기만 뒤집어 쓴 SUV가 아니다. 마세라티 흉내만 낸 SUV 또한 아니다. 마세라티다운 진짜 SUV다. 생김새만 해도 그렇다. 완만하게 기울어진 D필러는 깎아지른 듯 떨어지는 여느 SUV보다는 패스트백 스타일의 쿠페에 가깝다. A필러 역시 그 못지않게 드러누워 있고. 

모양은 설계와 이어진다. 남다른 속도감과 날렵함을 뽐내는 지붕 디자인은 객실공간이 성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트렁크 공간과 후방 시야 역시 다소 손해를 봤다. 모양을 뽐내느라 공간의 쓸모가 떨어졌다고? 아무렴 어떤가. 마세라티쯤 되면 쓸모보다 스타일인걸. 

하지만 오해해선 안 된다. 마세라티 디자인 팀은 아름다운 설계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후예들이다. 겉치레에 집착하는 일 없고 유려한 곡선에 속 깊은 의미를 담는 데 이들보다 탁월한 인재는 흔치 않다. 엔진 위치를 보라. 정확하게 앞 차축 위에 올라가 있다. 핸들링에 정교함을 더할 기본요건이다. 

파워트레인에 공간을 내준 객실은 3m 넘는 휠베이스가 보완한다. 트렁크 공간? 껑충한 짐을 구겨 넣으려면 애 좀 먹겠지만, 580L의 기본 적재용량이 부족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터다. 

멀뚱히 서서 보고, 앉아서 구구절절 떠드는 건 아무 의미 없다. 마세라티는 ‘(세게)달려야’ 하는 차다. 키 큰 SUV 르반떼도 예외가 아니다. 운전석에 앉는 순간부터 레이싱 GT 브랜드다운 강렬함으로 운전자를 압도한다. 운전대는 경주차처럼 꼿꼿하게 솟아 있다. 

보통(?)의 마세라티보단 너그럽지만 팽팽한 답력의 가속페달 역시 바닥으로부터 불끈 일어나 있다. 긴장감을 자아내고 정밀한 조작을 유도하는 운전환경이다. 서스펜션의 차고조절 상태나 차선이탈 경고의 작동 여부를 보여주는 그래픽은 ‘이런 기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오해를 부를 만큼 작다. 

그래, 마세라티는 머리로 읽기보단 온몸으로 느끼며 달리는 자동차다. 르반떼 GTS는 적당히 몰아서는 참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가속페달을 짓이기고, V8 3.8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을 한계까지 다그칠 때 비로소 잠재돼 있던 감각이 끓어오른다. 네 귀퉁이의 바퀴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노면을 제압하고, 중저속에서 출렁이던 차체는 불안감을 지우고 그 자리를 견고함과 열정으로 채운다. 

뒷바퀴에 잔뜩 힘을 실은 움직임은 위협적인 동시에 자신감 넘친다. 운전대 너머, 등 뒤에서 울려오는 소리도 입체감을 더해간다. 소음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다시 사운드로 변주해가는 과정의 낱낱이 생생하고 후련하다. 힘찬 회전, 폭력적인 속력과 선명한 움직임, 화끈한 사운드가 뒤엉키며 르반떼 GTS의 공간은 점점 더 끈적끈적하고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 기세 그대로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페달을 짓밟고 운전대를 휘젓고 싶다. 하지만 이걸 어쩐다. 차가 벌써 도로의 끝에 다다랐다. 

냉정이 부르는 안도감

글 김미한(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사진 포르쉐 

나에겐 철저한 친구가 있다. 매사 대충이 없는 사람이다. 심지어 일상대화에서도 그런 성향이 묻어난다. 이를테면 여덟 명을 셋으로 나눠 어디로 보내야 할 때, ‘셋, 셋, 둘’로 알아서 짐작하지 않는 자다. “9명이 아닌데 어떻게 3명 씩 나눠? 그러니까, 지금 당신 말은 3명 씩 두 팀 하고 2명을 말하는 거지?” 이렇게 콕 짚어 확인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뭐랄까, 답답한 타입은 아니다. 냉정하게 그건 “안 돼”라고 말하고 번복하지 않는 대신 대안을 준다. 물론 그에 상응해 일어날 손해나 문제까지 남김없이 말한 뒤 선택권은 넘긴다.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으레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걸 우정의 미덕으로 아는 이에겐 얄미운 캐릭터겠지만, 그는 올곧이 그렇게 관계를 하나씩 맺어 간다. 

그 사람에게 말을 걸긴 다소 불편하지만 일을 맡길 때 결과는 걱정하지 않는다. ‘잘해올 거야. 빼놓지 않을 거야. 안되면 다른 가이드라도 줄 거야’라고 믿게 된다. 때로 일에 있어 약간의 경외심을 부르는 그런 존재다. 

냉정함이 주는 믿음, 철저함이 주는 안도감. 내가 아는 한 포르쉐의 성향이 그렇다. 동그랗게 치켜뜬 두 눈과 반달을 긋는 지붕부터 꽁무니까지 이어지는 곡선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첫 만남만으로 절대 알 수 없는 침착함이 있다. 이런 느낌을 그저 기술의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아니면 기능 하나하나를 다 살려 넣은 버튼들을 보면서 포르쉐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엇 하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구나’하며 피식 웃을 수도 있다. 아주 단순하게, “비싸니까 좋은 차”라는 논리 또한 좋다. 그런데 숫자 앞에선 누구나 금방 둔해진다. 견적서에서 0이 하나 늘수록 장식이 늘고 가죽의 촉감마저 매끄러워지는 건 모든 차의 당연함인 걸. 

포르쉐의 냉정함은 어느 퇴근 길, 무모한 한 남자 앞에서 확실히 알았다. 입김이 나는 추운 밤이었고, 나는 포르쉐의 운전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꽉 막힌 반대편 도로와 달리 급가속 능력을 테스트 하고 싶은 충동이 일만큼 텅 빈 정지선, 맨 앞에 서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힘을 빼기도 전, 내 눈 앞에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비췄다. 

그가 불법 유턴을 했다. 채 1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 머리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킷 앞에서 배운 대로 왼발로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포르쉐는 돌이 갈리듯, ‘우두둑’ 소리를 냈다. 일상 도로에서 처음 써 본 풀 브레이킹. 정적이 흘렀다. 검은 세단과 포르쉐의 범퍼 사이는 채 한 뼘이 되지 않았다. 

수트를 입은 젊은 남자는 스티어링 휠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는 물방울이 내 눈 앞까지 반짝일 만큼 우리는 가까웠다. 도로의 모든 시선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전을 기대하는 듯한 사람들의 편견에 응하고 싶지 않았다. 포르쉐가 멈추지 못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었을 각도니까. 

나는 클랙슨조차 누르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나는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이 차는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내 고개를 당당히 세워 두었다. 지금도 정확한 모델명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마음 속 저 아래, ‘나를 살린 건 포르쉐’라는 잔상으로 남았다. 이후로 포르쉐는 내게 ‘냉정함’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운 포르쉐를 만날 때마다 저 깊은 마음속을 휘휘 저어서 일어내면 이들이 내놓는 어떤 차에도 같은 선입관이 생긴다. 카이엔도 다르지 않았다. 조금 키가 큰 포르쉐일 뿐이다. 누구는 “트랙에서 스포츠카처럼 달려도 괜찮은 유일한 SUV”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아마 가장 많은 여자를 운전석에 앉힌 포르쉐”라고도 구분한다. 

둘 다 동의한다. 나 역시 같은 소문에 비슷한 경험을 보탰다. 카이엔의 침착함은 고속도로에서 코너를 들어갈 때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2세대도 그랬고 3세대도 그렇다. 이 덩치로 뒤끝의 출렁임 없이 차분히 따라 붙는다. 일상만 달리기에는 아까운 면면이 있다. 계기판을 보면, 한 상 차림을 내놓은 근사한 테이블이 떠오른다. 

메인 디시처럼 보이는 타코미터와 좌우 2개씩 늘어선 원반 속 빨간 바늘은 하이글로시 터치패널 버튼과 어울려 완벽한 풀코스 정찬의 모습이다. 하지만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기능도 응답하지 않는 원칙이 서려 있다. 청바지를 입으면 입장 불가능한 레스토랑처럼, 카이엔의 서비스를 맛보려면 운전자도 합당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후로 우연히 길에서 카이엔을 만나면 로고에 흥분하기보다, 이 차를 선택한 운전자의 냉정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앞이건 뒤건 전보다 쪼개진 직사각형 램프 블록들이 얼음 병정처럼 서서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앞으로 제 길을 비출 때, 또 생각한다. 이번에는 포르쉐가 주는 믿음이 아니라, 이 냉정한 차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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