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기아 콩코드

조회수 2018. 7. 3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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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에 합병되기 전의 기아자동차는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에서 눈에 띄게 모험적인 제품 개발과 기술력 중시 성향을 가진 제조사로 통했다. 현대자동차가 자동차를 다수의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면, 기아자동차는 ‘기술의 기아’를 기치로 내걸고 뛰어난 주행 성능과 과감한 신기술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했다. 기아자동차의 이러한 기술 중심적 사고와 제품 개발 철학은 스포티지, 엘란 등,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모델들을 여럿 남겼다. 그리고 기아의 첫 중형세단 콩코드 역시 이 대열에 들기에 합당한 차종이라 할 수 있다.


 

기아자동차 콩코드의 등장은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는 이른 바 ‘3저 호황’, 86년도 아시안게임, 88년도 서울 올림픽 등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국내 자동차 산업계에서는 ‘암흑기’라 불러도 될 만큼 암담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당시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정권 산하에 있던 국보위가 내린,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내려진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는 1980년 8월 20일 발표한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의 일환으로 함께 발표된 사항으로, 명목 상으로는 국가가 나서서 국내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일종의 ‘구조조정’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이미 성장 가도에 있었던 자동차 산업계를 신군부의 입맛대로 쥐락펴락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 조치는 업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즉각 시행되지는 못하고 몇 차례의 조정을 거쳤다. 이에 따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라는 절충안이 만들어져 결국 시행에 이른다. 이 절충안이라는 것은 승용차의 생산을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로 이원화하고 기아자동차(당시 기아산업)는 이륜차 부문을 대림산업에 넘긴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신군부가 절충안까지 뽑아가며 강행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는 끝내 국내 자동차 제조사 간의 시장 경쟁 구도를 무너뜨리고 국내 자동차 산업의 질적 수준을 크게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조치에 있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자동차 제조사는 기아자동차였다. 적자로 휘청이던 이륜차 사업부를 떼어낸 것은 좋았지만 이제 막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고자 했던 기아의 입장에서 이 조치는 실상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상용차에 비해 수익성이 높은 승용차 사업이 막혀버리면서 기아자동차는 성장 동력이 끊어지면서 생존의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 때문에 기아자동차는 기껏 생산한 브리사의 엔진이 새한자동차에 공급되어 맵시에 탑재되는 등의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이 암울한 시절의 기아자동차를 구한 히트작이 바로 ‘봉고(Bongo)’였다.


 

봉고로 기사회생에 성공한 기아자동차는 1987년, 자동차 공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됨에 따라, 발 빠르게 새로운 승용차 모델을 내놓았다. 승용차에 목말라 있었던 기아자동차가 내놓은 새로운 승용차는 미국 포드자동차(Ford), 일본 마쓰다(Mazda)와의 월드카 프로젝트로 태어나 수출용으로 만들고 있었던 소형 승용차, 프라이드(Pride)였다. 프라이드는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완성도를 내세워 소형 승용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라이드 하나만으로는 이미 승용차 시장에서 중후장대한 라인업을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경쟁사들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하반기에 내놓은 것이 바로 기아자동차의 첫 중형 세단, ‘콩코드(Concord)’다. 콩코드는 당시 대우자동차와 현대자동차가 양분하고 있었던 중형 승용차 시장에 야심 차게 뛰어 들었다.


강력한 성능 앞세운 기아자동차의 첫 중형 세단

기아 콩코드는 본래 기아자동차가 프로젝트명 ‘NB-V’라는 이름으로 약 4년간 구상 및 개발해 오고 있었던 중형 승용차 모델이었다. 하지만 당시 기아자동차는 그동안 줄곧 라이센스 생산만을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NB-V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자기 힘으로 완성시킬 수 있을 만한 역량이 부재했다. 이에 따라, 기아자동차는 봉고의 라이센스를 제공한 일본 마쓰다(Mazda)와 협력해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쓰다 626(내수명 카펠라)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으로 개발 방향을 잡았다. 그리하여 1987년도부터 콩코드의 생산이 개시되었다.


 

콩코드의 기반이 된 마쓰다 626은 1982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모델이었다. 콩코드는 기아의 순수한 독자 모델은 아닌, 마쓰다 카펠라를 면허생산한 형태에 더 가까웠다. 다만 외관 디자인 일부를 수정하는 등, 기아만의 색깔을 가미했고 콩코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콩코드는 당시 국내 중형세단 시장에서 ‘최초’ 타이틀을 몇 개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국내 최초의 ‘전륜구동’ 중형세단이라는 점이다. 콩코드가 태어난 1987년, 쏘나타는 아직도 후륜구동 스텔라 기반의 초대 모델이었고 오펠 레코드 기반의 대우 로얄 프린스 또한 그러했다. 또 다른 ‘최초’ 타이틀은 국산 중형세단 최초의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의 채용이다.


 

콩코드는 당시부터 최대한 가볍고 타이트한 설계를 통해 차종을 불문하고 경쾌한 주행성능과 감성을 지향했던 마쓰다의 차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비록 한 세대 이전의 차대이기는 했지만 탄탄한 구조설계는 물론, 전후륜에 모두 맥퍼슨 스트럿 방식의 독립 서스펜션을 적용하는 등, 기본 하드웨어부터가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 덕분에 주행 성능 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아는 콩코드의 뛰어난 주행성능을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워, ‘프로페셔날 수퍼세단’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해가며 콩코드를 알렸다.


또한 마쓰다의 피를 이어 받은, 특유의 늘씬함에서 오는 스포티한 인상 덕분에 변호사나 의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의 ‘오너 드라이브 세단’으로 나름대로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차의 ‘크기’에 극도로 민감했던 당시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길이 4,550mm, 폭 1,705mm, 높이 1,405mm에 불과한 콩코드는 당대 중형세단 중 가장 작은 차였음은 물론, 휠베이스도 2,520mm에 불과하여 실내공간도 좁은 편이었다. ‘작다’는 꼬리표는 시장에서 콩코드의 약점으로 내내 따라 다녔고, 그 때문에 콩코드는 출시 후 단종되는 그 날까지 판매량에서 현대 쏘나타와 대우 로얄 시리즈를 넘어설 수 없었다.


콩코드는 출시 당초에는 2.0 SOHC 엔진과 수동 5단 혹은 자동 4단으로 구성되는 파워트레인을 제공했다. 콩코드의 2.0 4기통 SOHC 엔진은 99마력의 최고출력을 마쓰다 F 계열 엔진으로, 국산 중형세단 최초로 전자제어식 연료분사 시스템을 채용한 엔진이다. 이후 엔진 라인업을 차차 늘려가면서 상품성 강화에 나섰다. 두 번째로 추가된 엔진은 72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마쓰다의 RF 2.0리터 디젤 엔진이었다. 이 엔진을 얹은 콩코드 디젤은 구 새한자동차의 ‘로얄 디젤’ 이래,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 상 두 번째 디젤 승용차이자, 기아자동차 최초의 디젤 승용차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추가된 엔진은 당시만 해도 승용차 업계에서 주류로 통했던 1.8리터급 엔진이었다. 콩코드에 새롭게 도입된 1.8리터 SOHC 역시 마쓰다의 유닛. 1988년도부터 추가된 이 엔진은 가솔린 버전과 LPG 버전이 별도로 존재하는데, 이는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한 중형택시 도입 사업에 뛰어들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1.8리터 가솔린 SOHC 엔진은 95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 시기에 중형세단에서 보기 드물었던 화려한 그래픽의 액정 계기반을 채용한 것도 특이한 부분이었다. 이 액정계기반은 콩코드의 별도 트림인 DGT(디지털을 의미) 트림에만 제공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던 중 1991년, 콩코드는 한 차례의 변화를 맞게 된다. ‘뉴 콩코드’라는 이름으로 부분 변경을 거치게 된 콩코드는 길이를 20mm 늘리고 폭도 15mm 늘렸다. 새롭게 적용된 디자인은 카펠라의 색깔을 지워 내고, 기아차가 본래 목표로 했던, 더욱 점잖고 보수적인 인상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2년에는 그 보수적인 마스크와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변화가 더해졌다. 바로 ‘DOHC(Double OverHead Cam)’ 엔진의 도입이었다.


DOHC 방식은 하나의 캠축을 사용하는 SOHC 엔진과는 달리, 두 개의 캠축을 사용하여 흡배기 밸브를 각각 2개씩 설치하는 것이 용이한 데다, 두 개의 캠축이 흡/배기를 각각 분담하기 때문에 높은 회전 수에서도 한층 정교한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고성능 엔진에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이 당시 DOHC는 같은 의미인 ‘트윈캠(Twin Cam)’이라는 말과 함께 고성능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국내 중형차 시장에서 최초로 DOHC 엔진을 선보인 제조사는 현대자동차다. 1991년, 현대자동차가 Y2 쏘나타의 후기형 모델에 탑재된 2.0 시리우스 엔진을 통해 국내 최초로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기아자동차가 뉴 콩코드를 통해 선보인 2.0 DOHC 엔진은 당대 국산 중형세단 중 최고 수준의 성능을 자랑했다.


콩코드의 2.0리터 DOHC 가솔린 엔진은 139마력에 달하는 최고출력과 18.5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이 엔진의 출력은 Y2 쏘나타의 시리우스 DOHC 엔진에 비해 불과 2마력 높은 최고출력이었지만 콩코드는 Y2 쏘나타에 비해 200kg이나 가벼운 차였고, 여기에 마쓰다의 피를 이어 받은 탄탄한 섀시와 새로 도입한 전자제어식 서스펜션, 그리고 마쓰다 변속기 특유의 타이트한 기어비 등과 맞물려, 콩코드를 동급 최강의 주행성능을 자랑하는 중형세단으로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주행 성능으로는 더 큰 엔진을 탑재한 대형 세단인 그랜저마저 넘볼 정도였다.


강력하고 스포티한 달리기 실력을 지닌 콩코드는 국내 모터스포츠계에서도 활약한 바 있다. 대한민국의 ‘1세대 카레이서’로 유명한 박정룡 現 아주자동차대 모터스포츠과 교수가 선수 시절 이 차를 타고 국내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활약한 사례가 유명하다. 박 교수는 당시 콩코드로 용인 스피드웨이에서 열린 온로드 경기에서 당대 가장 강력한 국산차 중 하나로 통했던 현대 스쿠프들과의 경쟁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콩코드의 성능을 입증한 바 있다.


이후 콩코드의 이 2.0리터 DOHC 엔진은 우수한 성능 덕분에 후속 차종인 크레도스에는 물론, 스포티지의 가솔린 사양에도 사용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고급 후륜구동 세단으로 출시된 포텐샤, 그리고 이른 바 ‘군토나’라고 불리는 K-131 군용 기동차량에도 사용되는 등, 상당수의 기아자동차 차종에 채용되었다.


뛰어난 주행 성능을 강점으로 내세우며 합병 전 기아자동차의 도전 정신을 담아낸 중형세단 콩코드. 콩코드는 출시 후 장장 8년 동안 시장에서 판매를 이어가다 1995년 등장한 후속 차종 크레도스에 자리를 물려주고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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