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엔지니어들 - 한스 레드빙카 (2)

조회수 2021. 6. 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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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평가 받지 못한 자동차 설계의 선구자

1930년대는 세계적 경제난과 함께 시작되었다. 크고 호화로운 차들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자, 자동차 업체들은 작고 경제적인 차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한스 레드빙카가 주도해 설계한 백본 프레임 구조의 ‘타트라 섀시 콘셉트’를 바탕으로 자동차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타트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레드빙카는 에리히 위버라커(Erich Überlacker)와 자신의 아들 에리히 레드빙카와 함께 다시금 새로운 개념의 설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작은 크기의 차체에 넉넉한 실내 공간을 갖추고, 가볍고 연료를 적게 소비할 수 있는 해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일반적 설계로는 목표를 이루기 어려웠기 때문에,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들의 해법은 1931년에 만든 프로토타입 V570으로부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타트라 섀시 콘셉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타트라 54 (출처: Veloce Publishing)

타트라 57을 바탕으로 만든 첫 V570은 겉모습이 비교적 평범했다. 그러나 엔진과 구동계 배치는 전혀 달랐다. 백본 프레임 구조는 이어받았지만 새로운 공랭식 엔진은 차체 앞쪽이 아닌 뒤쪽에 놓였다. 공랭식 엔진은 냉각수 순환을 위한 장치가 필요없어 작고 가벼웠다. 엔진을 뒤로 옮기면서 앞 서스펜션 설계의 자유도도 높아졌다. 동력을 뒷바퀴로 전달하기 위한 프로펠러 샤프트가 사라진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무게를 줄일 수 있었을뿐 아니라 프로펠러 샤프트가 차지했던 공간을 실내를 넓히는 데 쓸 수 있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 결과, 일반적인 차체 형태로는 뒤쪽에 있는 공랭식 엔진을 충분히 냉각시킬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버라커와 에리히 레드빙카는 차체를 더 키워 엔진 주변 공간을 넓히도록 레드빙카를 설득했다. 레드빙카는 한발 더 나아갔다. 일찌감치 스승 격인 에드문트 룸플러의 영향을 받아 관심을 두었던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접목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공기역학적 디자인의 선구자인 파울 야라이(Paul Jaray)에게 자문을 구해 프로토타입에 유선형 차체를 올렸다.

유선형 차체의 타트라 V570 (출처: Yannick Leclercq via Wikipedia, CC BY-SA 4.0)

새로 만든 유선형 V570은 1933년에 첫선을 보였다. 둥근 차체 앞부분, 지붕에서 매끄럽게 흘러 내려오는 매끄러운 차체 뒷부분이 독특한 모습을 자아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자동차 업체가 레드빙카와 비슷한 아이디어로 만든 차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췬다프(Zündapp)를 위해 설계한 타입 12와 NSU를 위해 설계한 타입 32, 메르세데스-벤츠의 120, 요제프 간츠(Joseph Ganz)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슈탄다르트 주페리어(Standard Superior) 등이 대표적이었다.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작고 경제적이면서 대중적인 소형차를 만들기 위해 찾은 해법은 레드빙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레드빙카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당시 레드빙카는 포르셰와 수시로 교류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모종의 동질감이 있었고, 설계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에 관해 레드빙카는 '때로는 포르셰가 나를 참고하기도 했고, 내가 그를 참고하기도 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설계한 폭스바겐 타입 30 (출처: Volkswagen)

레드빙카의 전기인 '타트라 - 한스 레드빙카의 유산(Tatra - The Legacy of Hans Ledwinka)'를 쓴 저술가 아이반 마골리우스(Ivan Margolius)는 그의 책에서, 당시 설계자들은 자유롭게 서로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눴다고 이야기했다. 이미 1924~25년에 벨라 바레니(Bela Barenyi)는 1924~25년에 '국민차' 아이디어를 내놓은 바 있고, 카렐 흐르드리치카(Karel Hrdlička)는 1932년에 슈코다 932에 공랭식 뒤 엔진 뒷바퀴굴림 배치를 적용한 것에서도 그 무렵에 비슷한 설계의 차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차들 가운데 성공 사례는 많지 않았는데, 레드빙카의 V570은 다양한 기술 혁신을 하나의 차에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표적 차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 중에는 공교롭게도 당시 나치당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 1933년과 1934년 베를린 오토살롱에 방문한 히틀러는 타트라에 큰 관심을 보였고, 설계자인 레드빙카를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탁월한 설계에 감탄한 히틀러는 '독일 도로에 어울리는 차'라며 극찬하며 국민차의 틀을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레드빙카 설계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Kdf-바겐 (출처: Volkswagen)

그러나 독일 국민차 개발을 체코에 뿌리를 둔 타트라에게 맡길 수 없었고, 결국 레드빙카의 아이디어는 폭스바겐 비틀의 원형이 되는 Kdf-바겐으로 1938년에 독일에서 완성되었다. Kdf-바겐 설계의 많은 부분이 V570과 비슷했던 탓에 타트라가 소송을 걸었지만 독일이 체코 영토였던 주데텐란트를 1938년에 합병하는 바람에 흐지부지 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폭스바겐이 Kdf-바겐 설계에 레드빙카의 아이디어를 참고했음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1933년으로 돌아가, 레드빙카와 위버라커는 회사 사정으로 개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 유선형 V570 프로토타입의 시험을 이어 나가면서 같은 설계와 디자인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 개발한 공랭식 V8 3.0L 엔진을 얹은 대형차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대형차는 1934년에 77이라는 이름으로 첫선을 보였다. 77은 4~6인승 세단으로, 파격적인 유선형 차체가 화제였다. 1:5 비율로 축소한 모형으로 측정한 77의 공기저항계수는 0.2455에 불과했다. 엔진 출력은 초기형이 60마력, 배기량을 3.4L로 키운 후기형 77a가 75마력이었지만, 후기형은 최고속도가 시속 150km 이상이었다. 공기역학적 디자인의 승리였다.

혁신적 설계 개념, 공기역학적 디자인 등이 돋보인 타트라 77 (출처:Newspress UK)

이 차의 설계와 디자인을 더 발전시킨 87은 1936년에 나왔다. 77을 조금 줄인 차체는 77의 과도기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펜더와 차체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모습을 갖췄다. 다른 유럽과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이런 형태의 차체를 갖춘 차를 1940년대에 들어서야 만들기 시작했다. 차체 디자인의 새로운 시대를 연 87은 레드빙카가 가장 좋아한 차로 알려져 있다. 타트라는 87과 함께 좀 더 작은 크기의 97도 함께 생산했는데, 97의 앞모습은 2년 뒤에 나온 Kdf-바겐과 놀라울만큼 닮아 있었다.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고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타트라는 1939년에 승용차 생산을 중단했다. 생산 기간도 짧았고 타트라의 자동차 생산은 거의 수작업에 의존했기 때문에 레드빙카의 걸작들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물론 생산된 수 자체가 많지 않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국유화된 타트라의 모든 승용차는 77, 87, 97의 기본 설계를 계승 발전시키는 선에 머물렀다. 1948년에 나온 전후 첫 모델인 600 '타트라플란(Tatraplan)'을 시작으로 타트라의 마지막 승용차인 700이 단종된 1999년까지 백본 프레임, 공기역학적 차체, 뒤 차축 뒤에 공랭식 엔진을 얹은 동력계 배치 등 주요 특징은 그대로 이어졌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타트라 87과 함께 선 한스 레드빙카 (출처: Veloce Publishing)

한편 레드빙카는 2차대전 종전 후 소련의 압박에 의해 투옥되었다. 나치와 협력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복역 중에도 자동차 설계를 이어나갈 만큼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1951년에 석방된 그는 몇 달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고, 말년은 독일 뮌헨에서 보냈다.

엔지니어링 컨설턴트로 꾸준히 활동하며 몇몇 초소형차를 개발하기도 했던 그는 1967년 3월 2일에 뮌헨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체코 공산정권 하에서 전과자 취급을 당했던 그는 체코가 민주화된 뒤인 1992년에 복권되었고, 1999년에는 그가 처음 엔지니어로 체코에 발을 디뎠던 코프르지브니체의 한 거리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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