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만원짜리 갤로퍼, 국토대장정 떠나다

조회수 2021. 3. 10. 14: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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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핑 돌았다. 갤로퍼 차 키를 다른 이의 손에 넘기는 순간, 이 차와 쌓은 수많은 추억이 머리를 스쳐갔다. 함께 방방곡곡을 누볐고, 배를 타거나 캠핑을 함께 하기도 했다. 수도권 배출가스 5등급 자동차 규제만 아니었다면, 더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었는데….

갤로퍼2를 처음 마주한 때는 2019년 겨울이었다. 어머니 정년퇴직 날이 반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뭔가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다. “엄마, 퇴직하면 같이 전국일주 한번 안 할래요?” 놀랍게도 어머니는 무척 반기셨다. 곧바로 전국일주 프로젝트 준비에 나섰다. 그 시작점이 바로 갤로퍼2였다.

한 달간 전국을 돌며 캠핑할 계획이었기에 기존에 타던 세단으로는 도저히 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 높은 좌석에서 경치 구경을 즐기시는 어머니 취향과 어디든 다닐 수 있도록 전천후 성능도 고려해야 했다. 세컨카로서 부담 없는 가격도 마찬가지. 온갖 차를 고려하며 중고차 매장을 수없이 들락이다 보니 어느새 현대 갤로퍼2 열쇠가 내 손에 쥐여 있었다.

이런 안성맞춤이 또 어디 있을까. 9인승의 넉넉한 공간, 트럭 버금가는 강건한 구조, 정통 오프로더의 험지 주파 성능, 무엇보다 150만원에 불과한 가격까지! 여행용 차도 마련하고 초등학생 때 선망했던 모델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의 선택이었다.

여행 출발 10개월이나 앞서 차를 산 데는 이유가 있다. 150만원짜리 누적 25만km 달린 ‘똥차’로 전국일주가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10개월간 직접 차를 타면서 어머니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모실 수 있도록 미리 정비해놓을 계획이었다. 탐나는 캠핑 장비도 슬슬 사들이고.

기름범벅이었던 엔진룸이 건조하게 바뀌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 살 땐 분명 바짝 말라 있던 하체가 며칠 만에 촉촉이 젖기 시작한다. 냉각수가 뚝뚝 떨어지고 엔진오일도 줄줄 샜다. “이건 못 고쳐요. 엔진 오버홀(완전히 분해해 수리) 하세요.” 정비사가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내린다. ‘아니, 이렇게 좋은 리듬으로 제 출력 다 쏟아내는 엔진이 그럴 리 없어.’ 자칭 올드카 마니아로써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기름 줄줄 흘리며 단골가게까지 차를 몰았다. 믿음직한 사장님이 다시 내린 처방은 워터펌프와 엔진 헤드 커버 개스킷 교체. 기왕 뜯는 김에 디퍼렌셜 오일, 사륜 트랜스퍼 기어오일, 변속기 오일 등을 교환해 52만원으로 엔진 오버홀을 막아냈다.

한동안은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어두운 헤드램프로 서서히 시한부 수명을 알리던 발전기가 완전히 사망해 교체했고, 어느 날은 차가 좀 무겁게 나가기에 브레이크를 봤더니 캘리퍼가 디스크를 꼭 쥔 채 죽어있다. 당연히 바꿨다. 또 공기 압력이 슬슬 새는 앞 타이어는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아우르는 AT(All Terrain) 타이어로 바꾸고, 시꺼먼 엔진오일은 최상급 베이스 오일 파오기유를 100% 쓰는 제품으로 교체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전국일주 끝나고 계속 탈 생각이었기에 애정(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올드카 계기판은 단순하지만 그만큼 명료하다!

다행히 이쯤에서 갤로퍼는 신차 못지않은 컨디션을 찾았다. 잘 달리고 잘 서며 심지어 급가속할 때 검은 매연도 뿜지 않는다. 시험 삼아 달려본 서울과 광주광역시를 왕복하는 800km 장거리 여정도 거뜬히 소화한다. 정비 비용은 약 125만원. 차 가격만큼 정비에 돈을 쏟아부은 셈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275만원에 잘 정비해놓은 차를 산 셈이니 불만은 없다.

이제 여행 준비를 할 차례. 사실 처음 차를 가져올 땐 천장 위에 루프톱 텐트를 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높이 195cm짜리 차체에 루프랙과 텐트까지 얹으면 전체 높이가 2.3m를 훌쩍 넘는다. 웬만한 지하주차장은 못 들어간다는 얘기다. 과감히 포기하고 어디서든 널찍한 그늘막 펼칠 수 있는 접이식 어닝 얹는 정도로 절충했다. 하루 종일 차 탈 텐데 어머니 피부를 망칠 순 없다. 색 바랜 틴팅 필름을 모두 뜯어내고 자외선 차단 성능 좋은 틴팅 필름을 새로 붙였다. 물론 전면도 필수다.

드디어 출발! 꽉 막히는 서울을 탈출하자

서서히 차를 준비하다 보니, 드디어 2020년 10월 전국일주 여행 날이 다가왔다. 온갖 캠핑 장비, 먹거리, 어머니와 둘이서 한 달간 입을 옷, 10월 밤 추위를 막아줄 두꺼운 솜이불, 전기장판 등을 챙기니 집 거실이 가득 찼다. “아들, 이거 다 못 싣겠는데” 나 역시 겁이 덜컥 났지만, 차근차근 갤로퍼 트렁크로 짐을 날랐다. 세상에나, 그 많은 짐이 다 들어간다. 놀랍게도 위로 공간이 조금 남는다. 너비는 좁지만 차 높이가 1950mm에 달해 위로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다. ‘9인승 하이루프 만세!’

요즘 유니보디 SUV였다면 무게를 걱정했겠지만, 갤로퍼는 안심이다. 굵직한 철골로 엮은 사다리꼴 프레임 골격, 뒤쪽 판스프링, 그리고 견고한 리지드액슬이 어우러진 구성은 웬만한 무게는 거뜬히 소화한다. 그래도 안전을 생각해 서서히 달릴 생각이다. 어차피 최고출력 82마력 2.5L 터보 디젤 엔진은 가속 페달 짓이겨봐야 세상 느긋할 뿐이다.

갤로퍼는 시트 높이가 높고 유리창이 큼직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좋다

“저기 산세 좀 봐봐, 산봉우리 사이 끼인 구름이 너무 멋지다!” 다행이다. 앉은키 작은 어머니께도 갤로퍼 시야는 높은 모양이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이동하며 강과 산 구경 삼매경에 빠지셨다. 승차감도 다행히 괜찮으셨다고. 255/70R15 대형 타이어가 잔진동을 삼키고 폭신한 시트가 남은 충격을 억제한다. 과적에 가까운 짐도 차를 묵직하게 눌러준다. 어머니가 말씀하실 땐 온 신경을 기울여야만 알아들을 만큼 엔진이 요란스레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강원도 초입에서 첫 노지 캠핑을 했다. 울퉁불퉁 돌길 따위 갤로퍼 앞에선 문제도 아니다. 덕분에 무늬만 SUV인 녀석들이 진입을 포기한 깊은 오지에서 쾌적하게 캠핑을 누렸다. 아침에도 갤로퍼는 제 몫을 톡톡히 한다. 동쪽에서 사선으로 내리쬐는 햇볕을 195cm 키로 막아낸다. 해가 사선으로 눕는 아침이나 저녁엔 웬만한 그늘막보다 낫다.

양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먹거나 아니면 자거나

우리는 점점 강원도 깊숙이 빠져들었다. 거대한 삼양목장이나 대관령 양떼목장 등 볼거리가 풍성한 까닭. 그런데 이렇게 짐을 잔뜩 싣고 험난한 백두대간을 오를 수 있을까? 걱정 마시라. 갤로퍼는 뼛속까지 오프로더다. 오르막 따위 기어비가 따닥따닥 붙은 가속형 5단 수동변속기로 해결한다. 1단에선 못 오를 길이 없고 2단에서도 힘이 넘친다. 2000rpm만 넘어서면 터보 날개가 부리나케 돌며 21kg·m 최대토크를 뿜는다. 단지 느려터졌을 뿐 못 갈 길은 없었다.

계기판 옆 세 개 창이 늘어선 장치가 트리플미터다

갤로퍼만의 재미도 있다. 산 초입에서 대시보드 위 ‘트리플미터’ 고도계를 0으로 맞춰놓으면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도로라는 한계령에 올랐을 땐 바늘이 쑥 치솟았다가 고개 넘어 내려가니 푹 꺼진다. 정상에서 뚜껑을 땄던 페트병도 내리막에서 저 혼자 찌그러지며 기압 변화를 보여줬다.

설악산 꼭대기를 정복하고 동해 바닷길을 걸을 때, 갤로퍼는 든든한 이동식 기지였다. 짐을 담아두고 홀가분하게 놀러 갈 수 있었고, 동반석 시트 아래 서랍식 수납함에 남몰래 귀중품을 감춰두기도 편했다.

현대차는 1992년 ‘가자! 해를 따라 서쪽으로’ 라는 문구를 내걸고 갤로퍼 타고 전 세계 7만km를 횡단했다

여행 출발 후 이틀 만에 기름을 넣었다. 무거운 짐을 싣고 쉴 새 없이 달렸는데도 기름 넣는 주기는 긴 편이다. 연료 효율 때문은 아니다. 오래된 갤로퍼 4기통 디젤 엔진은 1L로 9~10km 정도밖에 못 달렸다. 비결은 연료탱크다. 무려 93L에 달하는 대형 탱크를 바닥에 붙여 낙타처럼 오래도록 굶은 채 달릴 수 있다. 괜히 현대차가 1992년 ‘가자! 해를 따라 서쪽으로’ 라는 문구를 내걸고 갤로퍼 타고 전 세계 7만km를 횡단했겠는가.

한참 경상도로 내려가는데 어머니께서 입을 떼셨다. “이렇게 행복하려고 그동안 그 고생을 했나 보다.” 쿨럭이는 불편한 자동차로 모셨는데, 변변한 잠자리를 마련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어머니는 매일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설렘이 너무 좋으시다고 했다. 왜 친구들과 매년 놀러 갈 생각은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할 생각은 못 했을까.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니 가슴이 미어질 만큼 부끄럽고 죄송했다.

점심 먹을 때 어닝이 쓸모가 많다

지역별 각양각색 음식이라도 대접해드렸다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전국 90명 즈음 코로나바이러스 19 확진자가 나오던 그때, 우리는 식당을 피하고 모든 음식을 직접 해 먹었다. 아침과 저녁은 캠핑장에서, 점심은 노지에서 해결했다. 그럴 때마다 자동차용 그늘막 ‘어닝’을 톡톡히 써먹었다. 길이 2.5m, 너비 2.5m 크기만큼 널찍이 펴져, 한낮 수직으로 비추는 따가운 햇살을 막아준다. 갤로퍼 9인승 키가 큰 덕분에 어닝도 높직이 자리 잡아 허리 펴고 서서 돌아다니기도 충분하다.

일정이 빠듯할 땐 종종 삶은 달걀이나 감자, 또는 시리얼로 간단히 점심 끼니를 때웠다. 갤로퍼 실내는 밥 먹기도 썩 나쁘지 않다. 요즘 차처럼 폭 파묻힌 자세가 아닌 차 위에 올라탄 듯한 자세로 앉기에 간식거리 주워 먹기 편하다. 더욱이 경치 좋은 곳에 차 세워놓고 먹으면 카페에 앉은 듯 운치 있다.

배 위에서 고정 중인 갤로퍼

경상도와 전라도를 넘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를 때 즈음, 제주도행 배에 올랐다. 배 꽁무니에 차를 넣으려는데 별안간 바닷물이 미스트처럼 차체를 덮친다. 부식은 괜찮을까? 차체 곳곳에 녹이 폈고 프레임도 뽀글뽀글 부식이 슬쩍 보이지만 상관없다. 차체 부식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진행되진 않는다. 2001년형 갤로퍼니까 20년이나 풍파를 버텨온 차다. 그 긴 세월을 고려하면 부식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제주도에서도 갤로퍼는 무탈하게 잘 달렸다. 한라산 능선을 누볐고 제주도 청정 바닷길을 힘차게 질주하기도 했다. 갤로퍼도 20년 평생 처음 밟은 섬이었을 테다. 제주도의 말끔한 자연에 유행타지 않는 네모반듯한 스타일이 썩 자연스레 녹아든다. 갤로퍼 옆구리에 붙은 말 모양 엠블럼이 혹시 제주도 말은 아니었을까?

갤로퍼는 든든한 여정의 동반자였다

4박 5일 제주도 여정을 마치고 충청도를 거쳐 마침내 출발지였던 서울에 도착했다. 한 달간의 전국일주는 모두 끝났다. 계기판 주행거리계 기준 총 누적 주행 거리는 3122km. 하루 종일 고속으로 달린 때도 있었고, 때때로 오프로드를 누볐으며, 높은 강원도 산길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갤로퍼는 단 한 차례 고장도 없이 든든히 달렸다. 어머니께서 ‘우리 로퍼’ 라며 애칭으로 부르며 정붙이셨던 이유다. 여정 동안 갤로퍼는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닌 듬직한 우리의 동반자였다.

이번 여행은 사실 개인적으로 자동차 전문지 기자 생활을 마감하는 의미도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광주광역시에 터 잡고서 한창 새로운 일에 열중하고 있던 12월 초. 별안간 전화기가 울렸다. “내년부터 <탑기어>로 출근할 수 있습니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야심 차게 세웠던 인생 계획쯤은 수정하면 그만. 다시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갤로퍼가 마음에 걸렸다. 서울에선 2021년 1월부터 3월까지 계절관리제를 실시해(원래 12월부터지만 단속하지 않았다) 배출가스 5등급 디젤차를 탈 수 없는 상황. 결국 어머니와 내 추억이 잔뜩 담긴 갤로퍼를 눈물을 머금고 팔 수밖에 없었다. 근 한 달간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폐차를 고려하던 12월 말, 극적으로 전남에서 보트 사업을 하는 사업가가 차를 흔쾌히 사 갔다. 지금쯤 내 갤로퍼는 꽁무니에 보트를 끌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겠지. 참 고마웠다. 오래도록 건강하길 바란다.

글‧사진 윤지수


갤로퍼에 얽힌 시시콜콜 이야기


꼼수로 등장했다

갤로퍼 9인승은 뒷좌석이 지하철처럼 서로 마주 보고 앉는다. 9개 좌석을 한정된 공간에 욱여넣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렇게 네 명이 앉는데 직접 앉아보면 사실상 고문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가는 차에 옆으로 앉아 있으려니 허리가 남아나기나 할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트는 사실 1994년 8인승 이하 SUV 특별소비세 부과 조치를 피하기 위해 급조해 태어났다. 당시 세제혜택은 무려 200만원에 달했다.

엠블럼에 담긴 진실

갤로퍼엔 현대 엠블럼이 없었다. 초기형 갤로퍼나 중기형 뉴갤로퍼엔 현대 글씨만 붙어있었고, 갤로퍼2가 등장했을 때도 이상하게 찌그러진 H 엠블럼을 붙였다. 이차는 현대자동차가 아닌 현대정공이 만든 차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중간한 태도로 ‘현대 갤로퍼’라고 광고해 현대자동차 이미지에 기대려 노력했다. 이후 2000년 2001년형 모델이 나오며 생산을 현대자동차가 맡았다. 이때부터 당당히 현대 엠블럼을 썼다.

트렁크가 이상해

트렁크 문짝이 오른쪽으로 열린다. 좌측통행하는 일본차(미쓰비시 파제로)를 바탕으로 만들었기에 남은 흔적이다. 2003년 갤로퍼2 생산을 끝마칠 때까지 문짝 방향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그깟 문짝 경첩 바꿔 다는 일이 그렇게 큰일인가?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 관계자는 “배기가스관 위치와 하체 구조를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문짝 방향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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