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나는 SUV다, 지프 랭글러

조회수 2019. 4. 22.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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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인’ 자동차 마니아인 나는 차밖에 모른다. 그러나 기자 일을 하며 딜레마에 빠졌다. ‘억 소리’나는 스포츠카를 타도, ‘가죽 범벅’ 호화 세단을 타도 별 감흥이 없어진 까닭이다. 자동차 만드는 능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각 모델 간 개성은 점점 희석되고 있다. 반면, 랭글러를 타면 무뎌진 감각이 쭈뼛 선다. 평범한 도심을 달릴 때도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니까.

글 강준기 기자|사진 FCA, 강준기



첫 문단을 읽고 코웃음 치는 독자들도 있을 듯하다. 랭글러에 대한 소비자 평가는 5:5로 극명하게 나눈다. 오랜 시간 변치 않는 DNA와 오프로드 능력에 마음 뺏긴 사람도 있고, “험로 갈 일이 얼마나 있다고 저런 불편한 차를 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번 랭글러 JL의 핵심은 오프로드 성능이 아니다. 일반도로 승차감이 눈에 띄게 좋아진 까닭이다.

개인적으로 신형 랭글러 시승은 두 번째다. 지난해 ‘악명 높은’ 미국 루비콘 트레일을 정복하며 남다른 험로주파 능력을 경험했고, 이번엔 평범한 서울 도심에서 랭글러의 진가를 느껴볼 차례다. 먼저 외모 소개부터. 루비콘의 차체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855×1,895×1,880㎜. 이전보다 105㎜ 길고 15㎜ 넓으며 35㎜ 높다. 휠베이스도 3m를 가뿐히 넘긴다(3,010㎜).



옆모습도 볼거리가 가득하다. 새롭게 장만한 17인치 휠은 안쪽에 윌리스 MB 모양의 빨간 스티커를 붙이는 등 깨알 같은 디테일도 더했다. 특히 루비콘 라인업은 BF 굿리치의 32인치 머드 타이어를 순정으로 신는다. A필러는 이전보다 각도를 완만하게 빚어 공기저항을 7% 줄였다. 연료효율과 정숙성을 함께 높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연료통 모양의 테일램프도 포인트.

Since 1941

무려 11년 만의 풀 모델 체인지다. 몇 개월마다 별별 핑계 대며 신형으로 거듭나는 여느 SUV와는 다르다. 지프의 시작은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G-5라는 군용차를 개발해 전장을 누볐다. 메르세데스-벤츠 G-클래스의 선조격인 모델이다. 이 차를 누여겨 본 미군은 G-5에 버금가는 군용차 개발에 착수했고, 1940년 입찰조건을 내놨다.

미 국방성이 요구한 항목은 사륜구동 장치, 공차중량 1,300파운드(약 589㎏), 적재중량 0.25t(톤) 이하, 승차정원 3명 등이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에 윌리스 오버랜드와 아메리칸 밴탐, 포드 등 3개 업체가 응했다. 결국 윌리스 오버랜드가 차지해 윌리스 MB라는 모델을 빚었다. 이 차를 시작으로 민수용으로 나온 CJ, 그리고 YJ, TJ, JK를 거쳐 JL까지 진화했다.



그러나 전통이 대수랴. 비슷한 가격으로 손에 쥘 수 있는 차가 다양하다. 매끈한 BMW X3도 있고, 우아한 메르세데스-벤츠 GLC도 있다. 모든 옵션 곁들인 현대 팰리세이드도 살 수 있다. 이들을 사서 후회할 일은 아마 없을 듯하다. 브랜드 가치는 물론, 최신 자동차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장비를 갖췄으니까. 즉, 개성만으로 랭글러를 사기엔 다른 차들이 눈에 밟힌다.

디지털과 담 쌓은 랭글러는 잊어라



그러나 이번 랭글러는 전통에만 안주한 반쪽짜리 오프로더는 아니다. 가격에 걸맞은 편의장비를 양껏 갖췄다. 가령, 센터페시아 중앙엔 시원한 8.4인치 터치스크린을 끼우고, 어두운 밤 분위기 책임질 엠비언트 라이트도 스몄다. 계기판 중앙엔 컬러 LCD를 넣었는데, 연비와 오디오, 사륜구동 시스템 등 다양한 정보를 한눈에 ‘쏙’ 확인할 수 있다. 룸미러도 ‘요즘’차 답다.



사실 기존 랭글러가 조립품질 좋기로 소문난 차는 아니었다. ‘툭툭’ 잘라 얹은 대시보드 등은 ‘미국감성’이라고 얼버무렸으니까. 반면 신형은 각 소재가 빈틈없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곧게 뻗은 대시보드엔 깊은 컬러의 패널을 더했고, 가죽 이음새는 빨간 실로 메우는 등 기교까지 부렸다. 각 버튼별로 누르는 방법도 조금씩 달라, 모든 조작 경험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구형 랭글러를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뒷좌석은 사람 태우기 미안한 공간이었다. 엉덩이를 반쯤 걸친 듯한 시트포지션과 곧추 선 등받이가 미운 사람 태우기 딱 좋았다. 그러나 신형은 기대 이상 포근하다. 가죽으로 몸을 애워 싸는 느낌이 랭글러 답지 않다. 뒷좌석 송풍구는 물론 40:20:40으로 나눠 접을 수 있어 활용도가 좋다. 트렁크 용량은 898~2,050L로 넉넉하다.



요즘 ‘차박’이 대세란다. 새로운 캠핑 트렌드로, 텐트 없이 차에서 숙박하는 용어다. ‘차박족’들에겐 풀 플랫 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랭글러는 2열 시트를 접었을 때 짐 공간 사이 공간을 메워주는 패널을 더했다. 덕분에 별도의 공사 없이 매트리스만 깔면 근사한 취침 공간으로 빙의한다. 특히 파워탑은 지붕을 시원스레 열 수 있어, 누워서 밤하늘 보기도 좋다.

효율과 파워를 양립시킨 2.0L 터보 엔진



신형 랭글러의 보닛은 직렬 4기통 2.0L 가솔린 터보 엔진 한 가지만 품는다. 기존의 V6 3.6L 가솔린 자연흡기 엔진을 대체하는 유닛이다. 5,250rpm에서 최고출력 272마력, 3,000rpm에서 최대토크 40.8㎏‧m를 뿜어낸다. 48V 전기 시스템을 더해 정차 시 시동을 끄고 켜는 ‘오토 스타트&스탑’ 기능도 챙겼고, 연료효율은 사하라 모델 기준으로 기존보다 36% 더 높였다.

물론 ‘다운사이징’ 엔진이 대세지만, 랭글러 같은 거구에 2.0L 엔진이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그러나 기우였다. 기존 V6 3.6L 가솔린 펜타스타 엔진 얹은 모델보다 사뿐하게 움직인다. 더욱이 엔진 소음은 차 밖에서도 아득히 들여온다. 방음‧방진 설계에 공을 들였다는 단서다. 단, 왼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풋레스트가 없어 운전 자세는 퍽 어정쩡하다.



요즘 SUV를 타면 세단 느낌이 물씬하다. 대시보드는 한껏 낮추고 센터콘솔은 훌쩍 높인 결과다. 반면 랭글러는 여느 SUV와 시야부터 다르다. 곧게 선 앞 유리와 반듯하게 떨어지는 센터페시아가 마치 장갑차에 올라탄 듯한 기분을 전해준다. 두툼한 기어레버 위쪽엔 윌리스 MB 모양 그래픽이 있고, 왼쪽엔 사륜구동 전환 레버도 자리했다. 그만큼 개성이 강하다.

사실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의 SUV는 구조상 요철을 만났을 때 섀시와 보디 사이를 연결한 이음새에서 ‘텅텅’거리는 소음이 증폭한다. 그런데 신형은 노면을 처리하는 실력이 평범한 SUV처럼 세련됐다. 불쾌한 바닥 소음과 진동도 철저히 틀어막았고, 조종감각도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다. 이만하면 출퇴근용 수단으로도 손색없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파워탑과 오버랜드 모델은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까지 더했다.



단, 소음에 민감하다면 루비콘보단 사하라 또는 오버랜드가 제격이다. 가령, 머드 타이어는 시속 80㎞ 이상에서 특유의 소음을 만드는 데, 시속 100㎞ 이상에선 동승자와 속삭이듯 얘기하는 게 힘들다. 또한, 파워탑 모델은 지붕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실내도 들이치는 풍절음이 상당하다. ‘스웨이바’에 대한 미련만 버릴 수 있다면, 정숙한 오버랜드가 더 끌린다.

지프 랭글러. ‘정통 SUV’라는 이유로 디지털과 담 쌓아왔던 랭글러가 이젠 편의장비까지 우월하다. 약점이었던 연비와 승차감도 한층 개선했다. 이제는 여러 고객층을 포용할 수 있게 변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 유행에 민감한 SUV가 싫다면, 랭글러와 함께 남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꿈꿔보는 건 어떨까.

<제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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