쌔끈파워 레인지로버 '벨라'

조회수 2019. 3. 19. 09: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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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귓가를 맴도는 클래식은 교양과 담쌓았던 내 귓가에 선명한 음표들을 한 아름을 쏟아 넣는다. 봄을 맞아 따사함을 머금은 햇살이 실내를 포근하게 비춘다. 손길 머무는 곳은 보드라운 가죽이 촉촉하게 스친다. 어디 ‘호캉스’라도 다녀왔냐고? 아니다. 바로 레인지로버 밸라 시승 당시를 떠올리며 적은 얘기다.



비율 천재


분위기를 꽤 고급스럽게 묘사하며 글을 시작했지만, 사실 벨라가 가장 고급차는 아니다. 브랜드로 봐도 그렇고 차급으로 따져도 마찬가지다. 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구리만 차던 나 같은 서민에겐 18K던 24K던 똑같은 금이요, 뭘 걸쳐도 호사다.


이보크 / 벨라 / 레인지로버 스포츠 / 레인지로버 (좌에서 우)

레인지로버 라인업에서 벨라는 이보크와 레인지로버 사이에 위치한다. 그래서 크기도 그 중간인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보크보다는 훨씬 크고 레인지로버 스포츠보다는 조금 작은 수준이다. 심지어 너비는 벨라가 58mm 너 넓다. ‘2,041mm? 어쩐지 차선이 꽉 차더라……’ 요란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외모도 덩치를 과시하는 용도는 아니어서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크기를 과소평가하기 쉽다. 생각보다 당당한 체구는 상당한 덩어리감을 자랑한다.


별 구김 없이 평평한 면은 차가 크니 넓기도 하다. 중간중간 도어핸들까지 매립식으로 숨겨 깨끗한 도화지 같다. 몇몇 디자인 요소는 붓으로 두께를 조절하듯 세심하게 그려 넣었다. 앞펜더와 앞문에 걸친 장식과 차체 하단을 지나는 선이 그렇다. 새하얀 시승차의 색은 동양화 같은 느낌을 더한다.


일부 장식에 쓰인 검정과 구리의 색 조합은 일찍이 2012년에 등장했던 푸조 컨셉트카 ‘오닉스(Onyx)’를 통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전과 패션 등 다른 분야에서도 널리 쓰이는데, 벨라에도 잘 녹아들었다. 자칫 심심했을 요소들을 고급스러워 보이게 만든다.


푸조 오닉스 컨셉트카

디테일도 디테일이지만, 내가 벨라의 외모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비율이다. 벨라의 비율은 일반적인 SUV의 껑충함이 아니다. 커다란 바퀴(21인치), 길고 넓은 차체, 그리고 차체에 비해 긴 휠베이스와 낮은 지붕이 만나 벨라만의 독특한 실루엣을 완성한다. 당당하고 육중한데, 동시에 스포티하다.


21인치 건메탈 휠
치켜 올라간 엉덩이
지붕에서 스포일러를 뚫고 들어가는 바람길
쏙 숨어들어가는 도어핸들
후방 카메라 옆 워셔액 노즐은 레인지로버답다

뿐만 아니다. 벨라에는 다른 레인지로버 모델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과 벨라만의 특징이 공존한다. 뒤로 갈수록 떨어지는 지붕 선, 반듯한 벨트라인, 반짝이는 검정 플라스틱으로 감춘 기둥들(A, B, C, D필러), 그리고 한껏 치켜 올라간 엉덩이는 모든 레인지로버 공통점이다.


반면 벨라만의 특징은 옆 창문에 있다. 높은 벨트라인과 나지막한 지붕 선이 만나 그 사이 옆 창문 면적이 덩치 대비 매우 작다. 동생 이보크도 비슷한 방향을 추구했지만 ‘작은 차에 작은 창’보다 ‘훨씬 큰 차에 작은 창’이라 효과가 극명하다. 이쯤이면 거의 디자이너가 초기 스케치 단계에서 그렸을 법한 비율. 여기에 앞, 뒤 유리까지 어지간한 스포츠 왜건급으로 눕혀 제법 속도를 탐하게 생겼다.


벨라 렌더링 (초기 과정인지는 알 수 없다)

고급스럽긴 한데......


밖에서 느꼈던 ‘힙’한 감각은 실내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역시 일등공신은 인컨트롤 터치 프로 듀오(InControl Touch Pro Duo). 벨라에 처음 적용됐고, 지금은 다른 레인지로버에도 모두 확대 적용했다. 차에 별 흥미가 없는 사람을 태워도 신기한 듯 관심을 보일 법하다. 위아래 2층으로 나뉜 디스플레이는 모두 터치로 조작 가능하다.


일단 LCD를 채운 그래픽은 해상도와 세련미가 훌륭하다. 화사하고 쨍하다. 아래 화면은 위로 실내온도, 시트, 차량, 설정의 네 가지 메인 메뉴를 두고 아래 두 다이얼을 돌려 각 메뉴에 해당하는 기능을 조절하도록 했다. 터치스크린이 모든 버튼을 삼켜가는 시대에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혼합한 재미있는 방식이다. 썩~ 편한 줄은 모르겠으나 시도는 좋았다.


고장은 안 나냐고? 이쯤 쓰다 보니, 벌써 저 밑에 달리고 있을 악플들이 ‘안 봐도 4K’다. 요즘 랜드로버를 바라보는 국내 소비자들의 시선이 매우 따갑다. 화면 안 꺼지냐고, 일단 거르고 보는 차라고…… 다행히(?) 2박 3일 시승 중에는 이렇다 할 고장을 겪지 못했다.


그렇다고 옹호할 생각은 없다. 이 정도라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났을 리도, 하루 이틀 문제일 리도 없다. 분명 품질 문제가 있었고, 그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던 게 분명하다. 나라도 거액을 주고 산 차가 주행 중 서거나 화면이 먹통 되면 화가 치밀겠지. 거기다 수리까지 제대로 안된다면 정말 ‘뚜껑’도 열릴 수 있다. 일단 이번 경험만 바탕으로 글을 이어가자.


인컨트롤 터치 프로 듀오가 아니라도 고급차에 타고 있다는 자부심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대시보드와 도어트림, 시트를 감싼 가죽과 그 사이를 일매지게 지나는 흰색 바늘땀, 중간중간 적재적소에서 은은하게 빛을 반짝이는 금속 마감이 공예품 같다. 17개 스피커가 들려주는 메리디안 디지털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의 음악도 호사스럽다. 이 정도 꾸밈새의 차를 탈 때마다 ‘역시 돈이 좋긴 좋구나’ 싶다.


시동버튼은 위치가 애매하다
메리디안 디지털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고급 소재의 환대는 2열도 마찬가지. 공간도 시트 등받이 각도도 불만 없다. 다만 가격 대비 장비가 어딘가 허전하다. 열선 시트가 제공하는 엉덩이의 따듯함과 파노라마 루프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 정도는 이제 제법 흔한 장비라 칭찬할 수 없다. 이 정도 가격표를 달았다면 뒷자리 좌우 승객도 각자 원하는 대로 온도 설정이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뒷유리 차광막은 왜 없을까?


뒷자리는 좌우 따로 온도조절을 할 수 없다

트렁크 용량은 558리터. 덩치를 고려하면 일반적인 넓이다. 공간은 네모 반듯하고, 2열 시트 등받이를 접어도 트렁크 바닥과 턱을 만들지 않아 짐을 부리기 좋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또 아쉬움이 남는다.


트렁크에서 2열 등받이를 접을 수 있는 레버가 없다. 해외 시승기를 찾아보니 분명 트렁크 벽 좌우에 레버가 있는데, 국내는 흔적만 남았다. 시승차는 국내서 팔리는 벨라 중 최상위 트림인데도 생략했다. 사실 이 정도 편의장치는 트림과 상관없이 들어가야 마땅하다. 심지어 전동으로 접혀도 이상하지 않을 가격 아니던가? 상황이 이러하니, 에어 서스펜션으로 차고를 내리는 버튼이 사라진 건 이상하지도 않다.


기본 트렁크 용량은 558리터
2열 등받이를 접으면 트렁크 바닥과 거의 평평하게 이어진다
트렁크 벽, 2열 등받이 접는 레버와 에어서스펜션 차고 조절 스위치의 흔적

기쁨보다 기품


비율상 지붕이 낮아서 그렇지, 높은 시트 포지션은 다른 레인지로버와 맥을 같이한다. 본래 오프로드 주행 중 거동을 살필 목적이었겠지만, 도심에선 다른 장점도 있다. 덕분에 막히는 길에서 전방 시야를 확보하기가 살짝 더 유리하고, 신호 대기 중 다른 차들을 내려다 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시승차는 ‘D300 R-다이내믹 HSE’다. 3리터 V6 디젤 터보 엔진을 얹고 ZF에서 공급받은 8단 자동변속기를 통해 네 바퀴를 굴린다. 엔진의 최고출력은 300마력, 최대토크는 71.4kgm다. 가솔린 슈퍼차저 엔진을 얹고 380마력을 내는 P380도 국내서 만날 수 있지만, 토크는 D300이 25.5kgm나 높다.


브랜드 막론하고, 디젤 엔진도 6기통 3리터 이상이 되면 평소 흔히 접하는 2리터 이하 4기통과 느낌이 확 달라진다. ‘딸딸딸’ 대던 디젤 엔진이 ‘두두두’ 거리며 ‘소음’ 대신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더구나 이만한 디젤 엔진을 얹을 정도면 대개 고급차일 경우가 많아, 방음에도 많은 신경을 썼을 터다.


벨라도 예외가 아니다. 오른발에 힘을 주면 기분 좋은 반응이 돌아온다. 소리도, 튀어나가는 느낌도 호방하다. 꽁꽁 막았지만 저 멀리서 넘어오는 엔진음이 귀를 즐겁게 하고, 70kgm이 넘는 토크는 2,160kg의 벨라를 주-욱 시원하게 밀어낸다. 묵직하지만 빠르다.


그런데 속도를 올릴수록 부담도 함께 커진다. 힘은 충분하다. 빨리 달리기 위해 엔진을 쥐어짜는 일은 없다. 분명 아직 여유가 남았지만,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을 놓게 된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벨라가 이렇게 말한다. “너 언제까지 그렇게 보챌래? 경박스럽게. 체통을 좀 지키렴”하고.


벨라의 움직임은 귀족스럽다. 고개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품위 있게 걸어야 제격이다. 몸을 납죽 웅크린 채 앞 차를 노려보며 RPM을 레드존까지 올리고, 차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따위의 움직임은 벨라와 어울리지 않는다.


가속페달을 아무리 콱 밟아도, 벨라는 콱 튀어나가지 않는다. 한 박자 쉬었다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밀고 나간다. 브레이크 페달을 짓이기거나 운전대를 휘저으면 앞이나 좌우로 쏠리는 무게가 전해진다. 거동이 크고 여유로워 꽉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기엔 속도가 붙을수록 부담이다.


이렇게 말하면 빠릿빠릿한 운동성능을 좋아하는 운전자들은 ‘별론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이 세상의 또 다른 운전자 대다수는 편안함을 추구하고, 특히 레인지로버의 주 소비자들에게는 이런 벨라의 움직임이 최적의 설정으로 보인다. 기쁨보다는 기품을 중시한 설정이다.


실제로 벨라의 실내는 어지간한 충격에도 좀처럼 여유를 잃지 않는다. 과속방지턱을 넘고, 공사 구간을 지나도 평온하다. 차고도 높고 에어 서스펜션이 네 바퀴를 받치고 있어 타이어와 노면 사이의 일들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 단, 구름 위를 떠가는 느낌이 쇼퍼드리븐 고급 세단만큼 두둥실 하지 않은 점은 SUV의 특징으로 봐야겠다.


벨라는 오히려 오프로드에 들어서 진가를 드러낸다. 오프로드를 위한 주행모드는 총 세 가지를 제공한다. 잔디, 자갈, 눈길을 하나로 묶고, 진흙과 모래는 따로 나눴다. 이 중 진흙을 선택하면 에어 서스펜션을 통해 차고가 스스로 50mm 위로 올라간다. 시속 105km가 넘으면 기본 높이에서 10mm 낮춰주기도 한다. 차고 조절은 가운데 기본 높이에서 위아래로 각각 50mm. 조절 폭도 크고, 오르내리는 속도도 꽤 빠르다.


시승을 위해 찾은 곳은 아주 험한 오프로드가 아니었다. 벨라는 이 정도로 되겠냐는 듯 모래와 자갈길을 너무 쉽게 달렸다. 그 와중에 승차감까지 좋았으니 쉬워 보일밖에. 국가대표 데려다 고등학교 체력장 평가하는 것 같아 난이도를 올렸다.


지난번 도심형 SUV를 타고 왔다가 감히 들어서지 못했던 자갈 오르막이다. 차고를 최고로 높인 뒤 슬금슬금 들어섰다. 행여 차체에 상처라도 날까, 실패하면 어떻게 다시 내려올까 걱정도 들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헛바퀴 한 번 돌지 않고 사부작사부작 기어올랐다.


이번엔 강물에 발을 담갔다. 언제부터 얼마나 깊어질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괜한 짓인가 잠깐 고민도 했다. 그렇다고 발가락만 담그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수심이 점점 깊어지고 바퀴 절반이 잠길 만큼 들어섰다. 미끄러운 강바닥과 거센 물살에 차체가 슬쩍슬쩍 옆걸음질 쳤지만, 겁먹은 건 나뿐이었다. 벨라는 태연하게 물을 털며 강기슭으로 올라왔다. 하긴, 제원상 최대 도강 수심이 650mm라고 돼 있으니 아직 여유가 있었던 셈이다.



아름다운 최신 레인지로버, 하지만...


벨라의 최대 강점은 디자인이다. 경쟁자들은 물론 길거리의 다른 어떤 차에도 뒤지지 않는 개성과 비율, 디테일을 갖췄다. 멋과 공간 모두 챙긴 실용성도 높이 살만하다. 쿠페처럼 멋진 지붕 선을 챙겼지만, 쿠페만큼 좁은 머리 공간까지 얻은 SUV들도 있으니까. ‘아름다운 최신 레인지로버’를 찾는 이들에게 벨라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주행성능도 레인지로버의 성격과 방향을 잘 따르고 있었다. 넉넉하고 편안한 거동에서 품격이 전해졌고, 육중한 차체에 들어앉아 바깥세상을 내려다보며 달리면 든든하게 보호받는 듯했다. ‘레인지로버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았던 게 이래서구나’ 싶었다.


반면 높은 가격표가 발목을 잡는다. 벨라의 가격은 9,590만 원(D240 S)에서 시작해 1억 2,160만 원(D300 R-다이내믹 HSE)까지다. 비슷한 값이면 BMW X5, 메르세데스-벤츠 GLE, 포르쉐 카이엔 등을 살 수 있다. 하나같이 쟁쟁한 경쟁자들이다. 주행성능, 편의장비, 브랜드 파워……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적수들이다.


그동안은 레인지로버는 탁월한 오프로드 주행성능과 편안함, 고급스러움을 브랜드 이미지에 잘 녹여왔다.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도 그냥 얻어진 건 아니었겠지.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모두가 앞다투어 SUV를 만들고, 레인지로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훌륭한 대안이 많아졌다.


벨라의 비싼 값을 만회할 수 있는 필살기는 바로 브랜드 파워다.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로 가는 지점이자,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는 무기다. 그런데 요즘 랜드로버를 싸고도는 소문들은 그동안 쌓아온 브랜드 파워를 빠른 속도로 허무는 중이다. 고장이 먼저 떠오르는 프리미엄 브랜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품질이 우선 걱정되는 차에 비싼 값을 치를 소비자는 없으니까.


이광환 carguy@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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