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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BMW 떠나 망해가던 포르쉐로 돌아온 이 남자

변성용 입력 2019.08.23 14:24 수정 2019.08.23 18: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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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은 빨랐을지도 모를 파나메라, 포르쉐 989 (1)
포르쉐 989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공자는 열다섯에 자신의 인생길을 확정 지었다고 한다. 과연 그러니까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열다섯 살로 거슬러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것은, 아무 생각 없는 아이일 뿐이다. 거대한 성취를 남긴 위인들이라고 해도 그 나이에는 별다르지 않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소년에게 길을 터 주는 것은 온전히 사회의 몫이다. 그걸 잘하는 나라는 늘 정해져 있다. 독일 같은 나라 말이다. 울리히 베츠(Ulrich Bez)의 삶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2차 대전 한복판의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가 고교를 졸업할 무렵, 박살이 난 나라는 어느정도 안정을 찾고 있었지만, 인생의 항로를 정하지 못한 것은 그 시절 독일아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를 따라간 공장에서 견습생 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의 첫 직업이었다. 엔진 헤드의 밸브시트를 매끈하게 다듬는 일이었다. 단조로운 일이었지만 타고난 근면함을 지닌 아이는 열심히 했다. 6개월이 지날 때 즈음이면 제법 솜씨를 인정받은 아이는 좀 특이한 작업에 보내진다. 그것은 포르쉐 최초의 F1머신, 804의 엔진의 밸브시트 작업이었다. 작업의 결과를 확인하러 불려간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아이는 난생 처음으로 F1 레이스카의 질주를 목격한다. 막연하던 인생의 방향이 또렷해졌다.

‘난 저걸 만들거야.’

804가 달리던 1962년은 레이스카에 공기역학 기술이 막 도입되려던 시점이었다. 아이는 공기역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을 물어, 슈투트가르트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다운포스에 대한 졸업 논문을 완성할 때쯤, 청년이 된 울리히 베츠는 다시 포르쉐에 찾아가 면접을 본다. 고작 대학생의 논문이었지만 이게 실제에서 통할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당찬 요구는 면접관의 이목을 끌었다. 인생의 길을 열어준 회사와 두번째 인연이 맺어진다. 포르쉐의 연구원으로 10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샤시와 동역학, 레이싱 부서를 거치며 어엿한 엔지니어로 성장해 가는 와중에도 베츠는 자신의 구상을 학문적 성취로 연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달픈 주경야독의 생활 끝에 그는 박사학위까지 마친다. 이런 일이 가능한 환경만큼이나, 그 또한 비범한 존재였다.

1962년 포르쉐의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아이는 우연히 F1의 세계를 접하고서 인생의 방향을 정한다. 

포르쉐를 떠나 BMW로 자리를 옮긴 것은 슬슬 상사와 마찰이 생기던 시점이였다. 그는 젊었고, 지식과 야망이 넘쳐났다. 자신만의 결과물을 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던 그는 새 직장에 가자 마자 선행기술 연구조직인 BMW Technik을 만들어 개발을 주도한다. BMW가 오늘날의 명성을 얻게 한 신기술이 속속 제품화 되었다. 신형 6기통과 8기통 엔진, 듀얼 클러치 변속기를 실체화 했고, 환경시험이 가능한 저소음 풍동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가장 인상깊은 결과물이라면 단연 BMW Z1이였다. 플라스틱 바디패널을 가진 이 2시터 쿠페는 당대 BMW의 소재, 샤시, 공기역학 기술을 응축시킨 결정체로 각광받았다.

BMW Z1, 1987년 나온 BMW 스파이더 계보의 첫 차다. 아래로 열리는 도어가 특징으로, 저 상태로 주행도 가능하다. 볼트로 고정된 경량 플라스틱 외피는 40분 정도면 모두 교체할 수 있었다. 

◆ 세 번째 포르쉐로

그렇게 울리히 베츠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동안, 그의 전 직장 포르쉐는 끝이 안보이는 추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상품 라인업은 70년대 말 이후 그대로였고 누구도 그걸 바꿀 생각을 안했다. 924와 928은 막대한 투자를 통해 만들어낸 신세대 포르쉐였다. 우매한 소비자들이 그걸 몰라줄 뿐이라 생각한 경영진은 이미 실패가 명확한 결과물을 붙잡은 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없는 여력을 쥐어짜 만든 기존차의 개수판, 944와 964까지 냉담한 평가를 받게 되자, 포르쉐는 진짜로 막다른 코너에 몰린다. 1985년이 되자 딜러망까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사회는 뒤늦게 운영진을 싸그리 교체한 뒤, 흩어진 포르쉐의 옛 식구들에게 SOS를 친다. 울리히 베츠에게도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는지 의사를 타진했다. ‘너랑 싸우던 상사 이번에 날아갔다’는 메시지와 함께. 연락 받은 지 한 달 뒤 그는 포르쉐의 연구총괄 이사가 된다. 포르쉐로의 세번째 복귀였다.

포르쉐 964. 현재의 높은 평가와 달리 시판 당시에는 매우 박한 평가를 받은 911이었다. 

◆ 993의 아버지

그가 취임하자 마자 한 일은 당시의’ 911’이였던 차, 964의 후속 모델 개발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클래식 911의 당당한 계보로 추앙받는 차지만, 1988년 당시의 964는 최악의 911로 거론되고 있었다. 차라리 전작 930이 훨씬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은 베츠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의 눈길 테스트에서 직접 스티어링 휠을 잡은 그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964가 되며 처음 도입된 4륜구동차, 카레라4는 비교대상인 메르세데스 E 4WD보다도 느렸다. 주행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변속기가 박살이 난 것이다. 베츠에게 포르쉐는 곧 911을 의미했고, 911은 당연히 최고여야 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회사는 골병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사회를 거세게 압박해 911의 재개발을 위한 예산을 따낸 뒤, BWM Z1을 함께 만들었던 디자이너 함 리가이(Harm Lagaaij)를 불러들인다. 리가이에게 떨어진 일은 디자인 수정 정도가 아니었다. 포르쉐의 향후 20년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새로운 디자인 컨셉 제시가 떨어진 것이다.

함리가이의 포르쉐 파나메리카나(Panamericana) 컨셉트. 비포장 도로경주가 섞여있던 1950년대의 카레라 파나메리카나 레이스를 오마쥬한 오프로더(!)다. 몇몇 급진적인 시도를 걷어내면 그 속에는 993, 996과 초대 박스터의 모습까지도 엿볼 수 있다. 포르쉐 디자인의 일대 전환을 상징하는 중요한 이정표 같은 차다. 

개발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필요 없는 지출도 줄여야 했다. 베츠는 비용대비 효과가 떨어지는 레이스 프로그램들을 정리했다. 르망24시 레이스가 속한 WSC 프로그램을 전면 폐지하고 미국 CART 레이스도 접었다. 남긴 것은 비용이 저렴하면서도 홍보와 연결되는 944기반의 원메이크 레이스 정도. 이런 저런 레이스에 산발적으로 나갈 바에는 우선 체력을 보전하는 쪽이 나았다. 이렇게 마련한 재원으로 그는 새 라인업을 준비한다. 911만 하나만 가지고 회사를 지탱할 수는 없었다. 새로 무엇인가를 만들되, 가능한 있는 걸로 빨리 만들어야 했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오리지널 포르쉐는 바로 ‘4 도어 패밀리 스포츠카’였다.

1988년, 포르쉐의 "4 도어 패밀리 스포츠카"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코드명은 989였다.

1967년의 포르쉐 911 세단. 포르쉐가 파나메라 훨씬 이전부터 다인승 포르쉐를 기획했다는 근거로 등장하곤 하지만, 이 물건은 사실 포르쉐의 작품이 아니다. 미국의 코치빌더가 독자적으로 만든 제안 모델이다. 

(2부에 계속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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