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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911을 꼴 보기 싫어했던 포르쉐 수장의 남다른 선택

변성용 입력 2019.07.17 15:21 수정 2019.07.19 11: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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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FR 스포츠카의 표준을 제시한 포르쉐 928 (1)
포르쉐 928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971년, 포르쉐에는 커다란 변화가 온다. 사업분야 별로 흩어져 있던 세 회사를 합치고 공개 유한회사(AG)로 전환한 것이다. 회사가 커지면서 더 이상의 ‘가족경영’ 방식이 통하지 않으리라 판단한 창업자의 아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는 전문경영인을 들이고 자신은 이사회 의장으로 한발 물러서는 체제 변화까지 감행한다. 회사를 떠난지 20년만에 기술 총책임자로 다시 불려온 에른스트 푸어만(Ernst Fuhrmann)이 다시 포르쉐의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변화의 갈림길에서 회사를 도약시킬 중책을 맡은 그의 첫 일성은 뜻밖이였다.

그는 911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푸어만 엔진이라고도 불리는 4기통 수형대향엔진 547엔진. 포르쉐 356 카레라 GT와 550 Spyder 같은 초기 포르쉐의 고성능 모델에 탑재되어 입지를 높인 엔진이었다. 

◆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그는 경영자였지만, 전문 엔지니어였으며, 그간의 성취만큼이나 자기 확신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푸어만은 경영자이면서 전문엔지니어였다. 그는 초기 포르쉐의 명성을 이끈 type-547(일명 푸어만엔진) 의 개발자였지만 1950년대 포르쉐를 박차고 나간 뒤에는 엔진개발업계에서 승승장구, 고엣체 (Goetze, 현재는 페데랄-모굴로 합병)의 대표까지 올라가 있었다. 주 고객사였던 메르세데스-벤츠의 엔진을 만들며 그는 벤츠의 개발방식에 동화되어 갔고, 그만큼 911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차량 개발자의 시각에서 본 911은 영문모를 자기고집만 가득한 차였다. 대표이사의 직무수행을 위해 받은 ‘회사차’ 911조차 그는 꼴 보기 싫어했다.

911로는 안 된다는 푸어만의 생각은 그저 편견에서 비롯된 아집이 아니었다. 외적인 이유도 충분했다. 356으로 탄생해 911로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한 회사는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히 독자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911로는 넓어지는 시장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폭스바겐과의 공조가 삐그덕 거리기는 했지만, 겨우 완성된 미드십 쿠페 914로 하위 시장은 메워진 상태였다.

포르쉐 914. 폭스바겐과 공동개발 후 사이좋게 나눠 팔려 했지만, 난항 끝에 포르쉐의 엔트리급 모델로만 발매되었다. 

문제는 911 위로 형성된 시장이었다. 재규어 E타입과 애스턴 마틴, 페라리의 12 기통 같은 프리미엄 스포츠가 장르화된 시장의 꼭대기에 자리를 잡자, BMW와 메르세데스-벤츠 같은 전통 프리미엄 브랜드까지 뛰어들 채비를 시작했다. 6시리즈와 SL클래스, 이들의 품질과 달리기가 어떤 수준일지는 차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방도를 찾아야 했다.

1971년 제작된 포르쉐의 신형 플래그십의 클레이 모델. 928의 기본적인 모습이 모두 담겨있다. 

사이즈와 엔진은 다들 제각각이었지만, 이들 프리미엄 스포츠모델들에게는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었다. 앞엔진 후륜구동(Front Engine Rear Drive, 이하 FR.) 엔진을 뒤차축 뒤에 올려놓은(Rear Engine Rear Drive, 이하 RR) 911로는 이들과 같은 조종성과 승차공간을 양립시킬 방법이 묘연했다. 여기에 스포츠카의 최대시장 미국의 상황까지 RR의 입지를 크게 좁혀 버렸다.

* RR방식의 다른 차 쉐보레 코르베어 (Chevrolet Corvair)가 자꾸 오버스티어와 전복사고를 일으키자 RR방식 자체를 금지시켜야 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든다. 이건 사실 코르베어의 스윙 액슬 서스펜션과 기다란 오버행이 낳은 문제였지만, 한번 삐딱선을 탄 여론은 시민운동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차를 아예 못팔게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포르쉐 경영진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 RR의 핸들링 응답성은 911의 매력이었지만, 미국시장에서는 지나치게 예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911을 사지 않은 미국 고객의 이유 중 하나는 차가 너무 휙휙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차는 좀 느긋하게 움직이는 게 좋다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것.

* 환경문제로 인한 배기 규제가 시작된다. RR의 좁은 엔진 공간속에 촉매와 배기 재순환장치를 밀어 넣는 일은 기술적으로 난항의 연속이었다.

새 사장의 주도로 면밀한 사전 검토가 시작되었고, 검토 끝에 FR방식의 새 차 만들기가 결정된다. 이런 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포르쉐에게는 문제이긴 했다. FR도 수냉식 엔진도, 전에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

928의 FR 레이아웃은 푸어만의 독단으로 만들어진 차는 아니었으며 미래에 대한 내부의 고심 끝에 내려진 결론이었다. 사진은 928의 레이아웃으로 검토된 방식들. RR방식 (왼쪽 상단) 은 물론 당시에는 미래의 엔진이었던 로터리엔진(!)의 FF(오른쪽 상단), 변속기만 뒤로 보내 뒷바퀴를 굴리는 트랜스 액슬 방식(왼쪽 하단), 엔진과 변속기가 앞쪽에 결합한 전통적인 FR방식(오른쪽 하단)이 보인다. 

◆ 포르쉐의 첫 수냉식, 첫 8기통, 첫 FR

앞엔진 뒷바퀴 구동방식을 사용하기로 했지만, 그 접근 방법은 기존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수냉방식, 뱅크각 90도의 V형 8 기통 OHC, 알루미늄 재질의 엔진은 다른 회사라면 익숙한 방법이었겠지만 공랭식 6기통이 전부였던 포르쉐는 모조리 새로 만들어야 했다. 기존의 수평대향 6기통과 부품을 공유할 방도는 없었지만, 엔진의 보어와 압축비가 똑같았던 것은 역시 익숙한 방법을 따랐기 때문.

3.9리터로 시작한 배기량은 경쟁력 확보를 이유로 조금씩 올라가 최종적으로는 4.5리터로 확정된다. 메스세데스 벤츠엔진의 최고 배기량이 4.5리터였기 때문이다. 240마력의 출력을 목표로 했지만, 촉매와 배기재순환장치(EGR)을 장착한 미국사양은 출력이 219마력으로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특이한 것은 변속기의 위치였다. 엔진다음으로 무거운 중량물인 변속기는 아예 뒤차축에 놓았다. 엔진과 변속기 사이는 고속 회전하는 샤프트를 내장한 토크튜브로 이어져 있는 트랜스 액슬방식이 채용된 것이다. 차량 중량의 이상적인 전후 배분 외에도 파워트레인 자체가 강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구조물로 기능하는 이상적인 방식이였다. 변속기는 자체 제작한 5 단 수동, 또는 메르세데스 벤츠제 3 단 자동변속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자동변속기 스포츠카가 드문 시절이었지만, 포르쉐는 자신들의 ‘플래그십’이 그랜드 투어러(GT)의 위치에 자리잡기를 원했다. 그리고 실제 928의 판매 대다수는 자동변속기였다.

928의 파워트레인. V8 엔진과 변속기를 내부에서 고속회전하는 토크튜브로 연결시켰다. 휠베이스 내의 무게 배분을 위해 앞뒤 캘리퍼의 위치까지 안쪽을 향하게 해 놓았다. 뒤쪽 트랜스액슬 뒤에 달린 상자는 66A짜리 배터리다. 이런 집착 탓 덕분에 차는 완벽한 50:50의 무게 배분을 맞췄다. 


수냉식인 것도, 8기통인것도, 4.5리터의 배기량도 포르쉐에게는 모두 최초였던 M28엔진. 나중에 5.4리터까지 확대된다. 

◆ 현대적인 FR 스포츠카의 표준을 제시하다.

928은 트랜스액슬은 물론 현대 스포츠카의 여러 기술이 최초로 구현된 차이기도 했다. 928은 경량화를 목표로 차체의 주요 부분(도어, 본넷, 펜더)을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첫 번째 차였으며, 뒷바퀴의 방향을 바꾸어 운동성을 향상시키는 개념, 4륜조향(4 Wheel Steering, 4WS)이 최초로 적용된 차기기도 했다. 코너링 중에 걸린 횡하중에 의해 외부 후륜의 토값이 기계적으로 최대 2도까지 변화, 안정된 코너링을 구현하는 "바이사흐 액슬" (Weissach Axle – 바이사흐는 포르쉐의 개발센터가 있던 곳)을 탑재한 것이다.

이 설계가 나중에 등장할 다른 회사의 4WS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4WS의 구현을 위해 세미트레일링 서스펜션의 컨트롤 암을 링크로 분해한 뒤 지지점을 분산시킨 리어 서스펜션은 뒷날 메르세데스 벤츠가 “멀티링크” 라는 이름으로 190E에 최초로 탑재하게 된다.

928의 리어 서스펜션. 현대적인 4WS와 멀티링크 서스펜션의 원형을 제시했다. 

때는 1970년대, 쐐기형태의 각진 보디가 대유행하고 있었지만, 포르쉐는 이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새차에는 911의 대표성을 걷어낸 뒤 포르쉐의 다음 수십년을 대표할 이미지가 담겨야 했다. 포르쉐의 전통 ‘공기를 거스르지 않는’ 디자인은 풍동테스트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928의 스타일링 작업. 뒤편에 포르쉐의 엔트리급 신형차 924도 보인다. 928은 924보다 훨씬 먼저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개발은 924와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924보다 나중에 시판된다. 비슷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924는 928과 기술적 접점은 전혀 없는 차였다. 폭스바겐이 거의 다 만든 차를 포르쉐에 넘겼기 때문이다. 

포르쉐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 한 노력은 원형 헤드라이트에도 담겨 있었다. 렌즈가 노출되어 있어 전혀 팝업처럼 보이지 않지만, 막상 라이트를 점등하면 앞으로 눈이 튀어나온 것처럼 올라왔다. 바디와 범퍼를 한 몸처럼 이어 붙인 일체형 범퍼는 당시에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시대는 1970년대, 플라스틱 범퍼와 알루미늄 패널, 강철표면에 모두 점착되는 페인트는 나오지 않았을 때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페인트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야 했다.

메르세데스 벤츠의 풍동에서 공기역학 테스트를 거쳐 표면을 다듬어 나갔다.

인테리어는 2명 탑승이 기본이지만, 필요 시 2명이 몸을 우겨 넣을 수 있는 2+2 구조로 만들어졌다. 계기판 전체가 스티어링휠과 함께 틸팅되며 시인성을 확보하는 시스템도 최초였다. T 자형으로 완만하게 탑승자를 감싸는 대시 보드 형상은 나중에 토요타의 소아라, 닛산 페어 레이디 Z같은 일본 스포츠카의 인테리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능적으로 최상의 GT를 목표로 한 928은 내장재 또한 면밀한 기능테스트를 거쳐 완성시켰다. 초기 인테리어 목업 기반으로 실내 공기의 흐름과 온도 확산을 테스트하고 있다. 
928은 전세계 시판을 염두에 두고 극한지 테스트를 진행한 최초의 차 중 하나였다. 아프리카의 혹서와 핀란드의 혹한 테스트를 통해 최종 완성도를 높였다. 
1976년 7월, 포르쉐의 경영진과 주요 주주가 모여 선행양산차(PP)을 살펴보고 있다. 개발을 시작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비교테스트를 위해 준비된 6시리즈와 SL, XJS에서 928의 목표 시장을 알 수 있다.
1977년 페리 포르쉐가 928과 함께 포즈를 잡았다. 붉은색 신모델의 본넷에 기댄 그의 이미지는 포르쉐 신차 발매의 전통이었다. 911과 356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젊어지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2부에 계속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사진=Porsche 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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