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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양반이 대우차 부사장으로 있었다니, 다시 봐도 놀랍다

변성용 입력 2019.08.30 13:22 수정 2019.08.31 14:5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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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은 빨랐을지도 모를 파나메라, 포르쉐 989 (2)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부에서 이어집니다)

◆ 989는 원래 카이엔?

포르쉐의 새 모델로 울리히 베츠가 처음 검토했던 차는 ‘SUV’였다. 지금과 같은 SUV 열풍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지만, 그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최대시장 북미의 오프로더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감지했고, 이 틈새시장을 파고들어가 보려 했다. 하지만 오직 스포츠카만 만든 순수 스포츠 브랜드의 이미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3세대 카이엔이 돌아다니는 지금에서야 뭔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당시는 1980년대였다. 메르세데스-벤츠도 BMW도 도심형 SUV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뒤의 일이다. 컨셉트 스케치가 진행된 정도만 가지고도 브랜드의 가치훼손을 염려한 논란이 회사 안에서 터져 나왔다.

한발 물러선 베츠는 4도어 스포츠 세단으로 방향을 바꾼다. 베이스가 된 것은 928이었다. 911을 대체한다는 원래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FR플랫폼과 V8 엔진은 있었다. 이것을 활용해서 훨씬 실용적이면서도 성능은 동일한 4도어 차를 만드는 것이 그의 복안이었다.

엔진은 당연히 928에 탑재된 V8을 기반으로 했다. 각국의 세금과 환경 기준에 따라 3.6리터에서 4.2리터 사이에서 250~350마력을 내는 엔진 계획이 잡혔다. 새 포르쉐의 디자인을 맡은 함 리가이에게는 ‘비즈니스 제트기’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4도어 차를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진다. 2826mm로 대폭 늘어난 휠베이스와 함께.

1989년 완성된 989의 1:1 목업(mock up) 1호. 실차도 이 디자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10년 뒤에나 나올 996의 모습이 이미 담겨있는 것이 이채롭다. 전부 한사람, 함 리가이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사진=포르쉐 AG
989의 실패가능성을 줄이려 포르쉐는 자체 디자인은 물론 외주디자인도 검토했다. 모든 결과물이 1:1 목업으로 제작되고 평가를 받았다. 1990년, 다섯 가지 디자인 목업이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위해 도열해 있다. 왼쪽에서 네 번째 은색모델은 이탈디자인의 외주디자인이다. 이 시절 쥬지아로는 정말 안 끼는 데가 없었던 듯. / 사진=포르쉐AG

◆ 하지만 돈이 없다

하지만 1991년에 접어들면서 989 프로젝트는 중단된다. 이 차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음모론은 얼마전 작고한 폭스바겐그룹의 제왕,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ëch)와 닿아 있다. 그가 자신의 신작 A8과의 경쟁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았다는 '썰'이다. (울리히 베츠 본인이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외삼촌 때문에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회사였지만, (포르쉐 928 이야기 2편 참조: https://auto.v.daum.net/v/NbfrsVuStH) 그 즈음의 피에히는 아우디-폭스바겐 그룹의 실권을 거머쥔 거물이면서, 포르쉐 감독이사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피에히 가문이 포르쉐의 지분 10%를 들고 있는 엄연한 대주주였기 때문이다. 아우디의 첫 대형차 A8의 개발에 피에히가 전력을 기울였던 사실과 합쳐져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 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피에히는 989에 호의적이였다. 프로토타입 실물을 보고서는 흠잡을 데 없는 차로 평가했을 정도였으니.

아우디 ASF(1993). 아우디의 알루미늄 모노코크 바디 컨셉을 현실화시킨 차로 발표 고작 4달 뒤에 동일한 차가 초대 A8으로 시판된다. 피에히가 989를 좌초시겼다는 음모론의 진원지.

989좌초의 시작은 사장의 ‘실수’ 때문이였다. 당시 포르쉐의 월급 사장은 아르노 본 (Arno Bohn). 컴퓨터 업계에서의 성취 덕분에 불려 들어왔지만, 그는 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는 잘 모르는 40대 경영자였다. 그가 손본 개발예산안이 실제 개발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였다는 것이 개발 초기 단계에서 드러난다. 이 사단이 날 동안 넌 뭐했냐는 욕은 베츠도 함께 얻어먹었음은 당연지사. 부랴부랴 투자예산안이 수정되었고, 그 결과는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989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10만 마르크 (2019년 물가로 환산 시 약 1억5천만원)의 가격으로는 판매가 불가능했으며, 적어도 15만 마르크(2019년 물가 기준 시 약 2억 3천만원)는 받아야 본전치기가 가능했다. 그것도 한 해 최소 1만 5000대를 팔아야만. 가장 큰 문제는 회사에 일단은 덤벼볼 자금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의 포르쉐 매출로는 이런 대규모 개발비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프로토타입 1호가 만들어질 정도로 개발은 잔뜩 진행된 상태였지만, 감독위원회는 일단 중지를 결정한다. 이대로 달리게 내버려 두었다간 회사가 자빠질 판이었다.

989의 인테리어. 포르쉐의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간직한 세련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989의 개발중단은 울리히 베츠에게는 그냥 나가라는 말로 들렸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확신이 넘쳐나는 사람이었으며, 단계적 개발로 발매를 1996년까지 늦추는 나름의 해법도 제시했지만, 감독위원회는 그의 의견은 묵살했다. 독선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에히와 불화는 이미 일상이었다. 3년의 추가 계약에 사인한 직후였음에도 그는 자신이 구상한 진로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회사에 미련을 버린다. 베츠는 사표를 던지고 포르쉐를 떠난다.

989프로젝트가 최종 폐기되는 것은 그의 퇴사 3개월 뒤였다.

989는 프로토타입 1대를 남긴 채 종료되어 버렸지만, 이 차의 많은 부분은 996으로 이어진다.

989는 오랫동안 포르쉐가 외면한 역사가 되었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그대로 사장당한 차가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파나메라가 나오고 난 뒤의 일이다. 그래도 이 차를 만든 울리히 베츠가 남긴 다른 유산들은 그가 떠난 뒤 고스란히 포르쉐 부활의 동력이 되어 준다. 그가 만든 공랭식 911의 마지막 세대, 타입993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빈사상태에 빠진 포르쉐의 재정을 빠르게 복구 시켰다. 989를 실체화 시키면서 나온 수많은 아이디어와 디테일은 이후 개발된 신형 911, 타입 996에 이식된다. 그가 입안한 포르쉐 SUV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차기 사장은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카이엔을 시판한다. 그 뒤의 일이야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포르쉐 993. 공랭식 911의 마지막이자 정점으로 추앙받는 차다.

◆ 울리히 베츠, 그 후

포르쉐를 떠난 울리히 베츠의 행보는 뜻밖에도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92년, 그는 대우자동차(!)에 기술고문으로 합류한다. 대우차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맨바닥에서 기술자립을 외치던 회사에 그의 개발능력과 네크워크는 소중한 자원이 되었다. 1년 뒤 베츠는 연구담당 부사장 자리에 오른다. 딱히 기술이랄 것도 없던 회사가 갑작스레 라노스-누비라-레간자로 이어지는 독자 라인업과 파워트레인을 초고속으로 쏟아낸 이면에는 부평 엔지니어의 피땀은 물론 그가 주도한 영국 워딩 테크놀러지센터, 그리고 뮌헨 파워트레인센터의 기술지원이 있었다.

대우 XK6엔진. 시작은 울리히 베츠가 BMW 시절 고안한 방식으로 동일생산라인에서 3,4,5,6기통의 제작이 가능하도록 한 모듈화 설계가 특징이다. eXtremely Kompact(극단적으로 짧은) 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짧은 직렬 6기통을 목표로 만들었다. V6 대신 가로배치 앞바퀴굴림차에 탑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경제위기의 파고를 넘지못한다. 그는 대우차를 떠난 뒤, 당시 대우차를 인수하려던 포드에 합류했고, 결과적으로는 포드의 산하 브랜드 중 하나였던 애스턴 마틴의 경영을 맡는다. 그가 맡을 즈음의 애스턴 마틴은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회사였다. 재무상태는 엉망이였고, 차는 나온 지 몇 년 된 DB7 하나가 다였다. 극단적인 상황이였지만, 그는 데쟈뷰를 느꼈다. 망하기 직전의 회사, 오래된 911 하나. 1988년 포르쉐의 상황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뜻을 실현시켜 보리라 그는 다짐했다.

Dr. Ulrich Bez. 2000년부터~2013년까지 애스턴마틴을 이끌었다.

그는 애스턴 마틴에서 14년을 보냈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애스턴마틴은 스무 가지가 넘는 신모델을 만들고, 도합 5만대가 넘는 차를 팔았다. 13년 동안 5만대라니,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창사 이래 그가 오기 전까지 90년 동안 팔린 애스턴마틴의 3배가 넘는 숫자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 시판된 애스턴 마틴 중에는 4도어 패스드백 세단, 라피드도 있었다. 적어도 울리히 베츠에게 있어 989의 진정한 적자(嫡子)는 파나메라가 아니라, 라피드일지도 모르겠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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