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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

다음자동차 입력 2020.07.10. 14:47 수정 2020.07.1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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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 브랜드 히스토리(4)

BMW 위기를 통해 기회를 모색하다

통상 신차를 개발할 때 4~5년의 시간과 수천억 원의 비용이 필요하다. ①디자인 ②엔지니어링 ③마케팅 등 크게 3박자가 맞아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빛을 못 본 차도 수두룩하다. 또한 개발과정에서 초기 콘셉트가 희석돼 전혀 다른 차종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부서 간 기 싸움도 만만치 않다. 반면 BMW는 일관된 철학으로 신차를 빚는다.

BMW는 설립 이후부터 항상 위기 속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항공기 엔진, 모터사이클 등 남다른 엔지니어링으로 기틀 다진 회사답게, 업계를 선도하는 기술력으로 전쟁과 석유파동 등의 숱한 위기를 극복했다. 그래서 BMW 내부엔 늘 ‘위기의식’과 ‘긴장감’이 짙게 깔렸다. 특히 1970년대 들어 걸출한 선장의 지휘 아래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로 성큼 다가갔다.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

1970년 BMW CEO로 취임한 에버하르트 폰 쿠엔하임(Eberhard Von Kuenheim)이 주인공이다. 그의 회사 운영방식은 ‘얼음채찍’으로 유명하다. 그의 인생 내막을 살펴보면 블록버스터를 방불케 한다. 192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0대 때 아버지를 잃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의 이른 나이로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복무 중엔 어머니가 러시아군에 포로로 잡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쿠엔하임은 무너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보쉬에 들어가 냉장고와 자동차 부품을 만들며 일을 배웠다. 업무능력이 좋아 회사에서 장학금 지원받고 대학에서 공학학위를 따냈다. 이 무렵 콴트 가문의 눈에 띄었다. 하랄트 콴트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기술책임 임원으로 스카웃했다.

역랑을 키워가던 쿠엔하임에게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하랄트가 죽자 형 헤르베르트는 쿠엔하임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하랄트의 사업체 중 하나를 운영하라고 지시했다. 방만한 운영으로 곪은 데가 많은 업체였다. 쿠엔하임이 단기간에 ‘건실한 회사’로 바꿔놓자 헤르베르트는 그를 BMW의 차기 CEO감으로 점찍는다. 1970년 공식 임명했다.

1975 BMW 3시리즈

그는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철학 아래 3‧5‧7 등 새로운 라인업을 선보이며 들쭉날쭉한 BMW 라인업을 간결하게 개편했다. 여기엔 밥 루츠(세일즈&마케팅 총괄), 폰 팔켄하우젠(치프 엔지니어), 폴 브라크(수석 디자이너) 등 부하 3인방의 긴밀한 협업도 한 몫 한다. 그 결과 1970년 17억 달러였던 글로벌 판매수익은 10년 사이 40억 달러로 ‘폭풍성장’했다.

1990년대 경제위기, SUV로 넘어서다

탄탄대로 같은 BMW 앞에 또 한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1990년 8월, 걸프전이 터지며 기름 값이 폭등했고, 미국은 경제 불황으로 휘청거렸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일본 3사 럭셔리 브랜드가 공습했다. BMW를 포함한 프리미엄 제조사의 간담을 서늘케 한 주역이다. 자동차 업계는 인수합병 통해 규모를 키우고, 원가를 줄이기 위해 움직였다.

이때 BMW가 노린 ‘먹잇감’은 미니, 재규어, 랜드로버 등을 보유한 영국의 로버 그룹이었다. 그러나 로버 그룹 인수는 BMW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플랫폼 공유를 통해 원가 낮출 차종도 마땅히 없거니와, 영국정부의 규제 강화로 외국기업인 BMW가 로버를 입맛대로 쥐고 흔들 수 없었다. 더욱이 렉서스가 미국인의 마음을 훔치며 판매수익이 쭉쭉 떨어졌다.

BMW는 1990년대 초반, 5시리즈 플랫폼 바탕의 SUV를 만들어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개발자들의 원칙은 딱 한 가지였다. ‘BMW 냄새가 나는 SUV가 아닌, SUV 냄새가 나는 BMW’를 만들자고. 트럭 기반의 SUV가 판을 치는 북미에서 색다른 제품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가령 개발과정에서 엔진 위치를 몇 ㎝ 낮추고, 5시리즈의 독립식 서스펜션을 물렸다.

1997 벤츠 M 클래스

그러나 SUV 제작경험이 전무한 제조사가 ‘뚝딱’하고 만들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1994년 랜드로버를 품에 안으며 X5의 완성도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특히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은 랜드로버의 기술로 한층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로버 그룹 인수로 SUV 프로젝트가 뒤로 밀렸다. 결국 메르세데스-벤츠 M클래스보다 2년 늦은 1999년 X5를 선보였다.

1999 BMW X5

X5는 뼛속부터 달랐다. M클래스는 본래 G바겐 후속으로 기획한 차로, 모양은 승용인데 속은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의 정통 트럭이었다. 반면 BMW는 SUV나 트럭 대신 ‘SAV(스포트 액티비티 비이클)’란 새로운 용어를 앞세워 틈새를 노렸다. 초기엔 품질문제로 몸살을 앓았지만, 2003년 컨설팅회사 스트래티직 비전이 뽑은 ‘최고의 럭셔리 SUV’에 올랐다.

클라우스 루테의 퇴장, 크리스 뱅글의 혁신

클라우스 루테

1976년, 폴 브라크의 후임으로 아우디 출신 클라우스 루테가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왔다. 그는 보수적이던 BMW의 표정에 활기 넣은 주역이다. 2~3세대 3시리즈, 3세대 5시리즈, 8시리즈 등을 빚으며 1990년까지 BMW 디자인을 이끌었다. 직선 위주의 반듯한 차체, 낮고 평평히 다진 보닛,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비율은 지금도 올드카 마니아를 열광케 한다.

그가 커리어 정점을 찍던 1990년 4월, 독일 일간지 1면엔 일제히 이런 기사가 실렸다. ‘BMW 수석 디자이너, 아들 살해혐의로 체포’. 오랜 시간 불화를 겪은 마약 중독자 아들과 어느 날 말다툼을 벌였고, 끝내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BMW는 최고 변호인단을 꾸려 루테를 전폭 지원했고, 결국 33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는 데 그쳤다.

BMW는 루테가 복역하는 동안 실내 디자이너인 한스 브라운에게 지휘를 맡기고,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남겼다. 루테가 출소하자마자 BMW는 복직을 제안했다. 루테의 뛰어난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제안을 뿌리쳤고 대신 디자인 고문 자격으로 1990년대 말까지 뒤에서 은밀히 활동했다. BMW는 발 빠르게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크리스 뱅글

당시 BMW R&D 총괄 볼프강 라이츨레는 ‘세계적인 비전’ 가진 인물을 원했다. 때마침 전 수석 디자이너 폴 브라크가 “아주 괜찮은 젊은 디자이너가 있다”고 귀띔한다. 오펠을 거쳐 피아트에서 혁신 이끈 크리스 뱅글이다. 성격 급한 라이츨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이 만남에서 뱅글은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개혁의 칼자루를 넘겨받았다.

크리스 뱅글이 이끈 21세기의 BMW

뱅글이 합류한 뒤 3‧5‧7시리즈, X5 등 모든 라인업을 수술대에 올렸다. 라이츨레는 금속판의 반지름까지 하나하나 간섭할 정도로 디자인 부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열정남’이고, 나쁘게 말하면 짜증나는 상사였다. 그는 “뱅글은 내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인재다. 디자인팀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동기를 유발했다”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2001 BMW 7시리즈

2001년, 드디어 첫 번째 결과물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올랐다. 뉴 7시리즈다. 기존의 네모반듯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괴상하게 생긴 7시리즈가 등장했다. 관객은 충격에 빠졌고 각종 비난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뱅글은 신형 7시리즈를 지겹도록 변호하기 바빴다. BMW는 전 세계 자동차 기자 800명을 뮌헨으로 불러 설명회를 가질 정도였다.

BMW 재무담당 이사도 뱅글을 나무랐다. 센터콘솔 등 사소한 부위까지 비싼 재료에 집착한다고. 그러자 뱅글은 케루빔(아기천사)이 새겨진 뮌헨의 고딕풍 성당 사진을 들이밀며 “성당에 케루빔을 새기는 데 많은 비용이 듭니다. 하지만 케루빔이 없는 성당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받아쳤다. 작은 부위까지 세심하게 설계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2001 BMW 7시리즈

7시리즈는 뱅글의 작품, 그 이상이었다. 3‧5‧7로 이어지는 틀에 박힌 표정이 싫었다. 캘리포니아의 디자인 회사 ‘디자인웍스’를 인수했고, 사내 5~6개 팀을 디자인 과정에서 경합을 붙였다. 내부경쟁을 펼쳐 더욱 창의적인 제품을 내놓고자 노력했다. 현재 BMW 그룹 디자인 총괄인 아드리안 반 호이동크(당시 디자인웍스 소속)의 첫 스케치를 토대로 발전시켰다.

뱅글은 “우리는 실용적인 기계로서 자동차를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는 고품질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으로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말했다. 즉, 뱅글은 기존 카 디자이너의 딱딱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예술적으로 사유하는 자동차를 빚었다. 이후 로드스터 Z4, 일명 ‘독수리 눈매’ 품은 5시리즈 등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우뚝 선다.

BMW의 혁신은 ‘현재 진행형’

2006년, 헬무트 판케가 정년퇴임하고,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가 신임 CEO 자리에 올랐다. 전 BMW 미국 생산부문 사장으로, 1987년 입사해 생산과 개발 등의 부서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의 지휘 아래 BMW는 전동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혁신에 나섰다. 2013년 선보인 전기차 i3가 주인공이다. 닛산 리프 이후 프리미엄 브랜드가 선보인 첫 전기차다.

BMW i3

이 차는 ‘세계최초’로 가득하다. 양산 전기차 최초로, 머리카락보다 10배 얇고 일반 철보다 50% 가벼운 CFRP(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로 골격을 짰다. 그 결과 i3는 공차중량 1,195㎏을 달성하며 ‘전기차는 무겁다’는 편견을 지웠다. 또한, 차체는 미국 모세 레이크에 자리한 수력발전소에서 100% 물의 힘으로 만들었다. 과연 진정한 ‘친환경차’라고 부를 만하다.

더욱이 실내를 감싼 직물은 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친환경 소재로 둘렀다. 대시보드 패널은 유칼립투스 나무, 통상 석유로 만드는 플라스틱 트림은 케나프(Kenaf, 양마) 소재로 대체했다. 차체 밑바닥엔 삼성 SDI와 함께 개발한 배터리팩을 깔았다. 단 1분 충전으로 4㎞를 달릴 수 있으며 50㎾ 급속충전기를 쓰면 약 40분 만에 최대 80%까지 충전할 수 있다.

BMW 배터리 스토리지 팜

‘지속가능한 성장’. BMW 전동화 전략의 핵심 키워드다. i3로 꿈꾼 진정한 친환경을 발전시키고 있다. 가령 2017년 독일 라이프치히 공장에 중고 배터리 700개 엮은 ‘배터리 스토리지 팜’을 세웠다. 라이프치히 공장은 풍력에너지를 쓰는데, 바람 안 부는 날엔 전기 에너지가 너무 적고, 바람이 많이 불면 에너지가 넘친다. 한 마디로 ‘들쭉날쭉’하다.

이를 실제 i3에 들어갔던 폐배터리로 관리한다. 전기 에너지가 풍족할 때 배터리에 모아놓고 부족한 날에 푼다.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다. BMW 코리아가 세운 ‘e-고팡’이다. 풍력발전소에서 에너지를 받아 10개의 폐배터리에 에너지를 저장해둔다. 이를 전기차 충전소로 쓴다. 폐차장 ‘고철덩어리’ 신세였던 배터리가 새 생명을 얻은 셈이다.

BMW 비전 i넥스트

모두가 이젠 ‘전기차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BMW는 단순히 유행 쫓아 신차를 기획하지 않는다. 2016년, BMW 창립 100주년 맞아 선보인 BMW 비전 넥스트 100 콘셉트가 좋은 예다. 과거 100주년을 기리면서 다가올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콘셉트 카로, 차체와 통합한 휠, 100% 자율주행 시스템을 통해 BMW가 꿈꾸는 미래를 가늠할 수 있다.

2023년까진 25종의 전동화 모델을 선보여 i3와 i8의 틈바구니를 빼곡히 채울 계획이다. 그러나 파워트레인 변화는 BMW의 오랜 가치를 희석시키지 않는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말하듯, BMW는 미래에도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타이틀을 놓지 않을 계획이다. 창립 이후 남다른 엔지니어링으로 굳건히 성장한 BMW. 과거보더 미래를 더 기대하는 이유다.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사진/B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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