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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블레이저에서 잠잘 수 있을까? 진짜 '차박' 도전기

윤지수 입력 2020.07.08. 20:24 수정 2020.07.08.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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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다. 팔다리 못 펴고 뭔가 걸리적거리면 밤새 뒤척일 정도다. 그런 기자가 차박 도전에 나섰다. 더욱이 조그마한 소형 SUV로.

글 윤지수 기자 / 사진 윤지수, 쉐보레

길이 4,425㎜ 트레일블레이저는 출시 당시 동급 최대 크기 소형 SUV였다. 지금은 르노삼성 XM3(4,570㎜)가 가장 크다

그나마 다행으로 시승차는 소형 SUV 생태계 교란 종인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다. 황소개구리 같은 큼직한 덩치는 길이 4,425㎜, 너비 1,810㎜, 높이 1,660㎜에 달해, 소형 SUV는 물론 준중형 SUV까지 넘본다. 과연 이 차에 성인 남성 표준 체격 수준 기자가 다리 뻗고 누울 수 있을까?

잿빛 도시를 떠나 풍경 좋은 장소를 향해 떠났다

차박 장소로 가는 길

차박 매력은 자연 속에서 맞이하는 싱그러운 아침일 테다. 그래서 시승차를 받자마자 잿빛 도시를 떠나 풍경 좋은 장소를 향해 떠났다.

시트 높이가 낮고 앞 유리창이 멀찍이 떨어져 '큰 차'에 앉은 느낌이 든다

가다 서다 반복하는 서울을 빠져나오는 길. 첫인상은 만족이었는데, 질감은 조금 아쉽다. 일단 작은 차 주제에 큰 차 탄 느낌은 좋았다. 뚱뚱한 외모로 엿볼 수 있듯, 앞 유리창이 운전석으로부터 참 멀리도 떨어졌다. 어디 쓸 일 없는 공간이지만, 멀리 뻗은 앞 유리창 아래가 다 ‘내 공간’ 같아 기분이 좋다. 더욱이 쉐보레답게 보닛 뒤로 폭 파묻힌 듯한 운전 자세도 큰 차 느낌을 돋운다.

그러나 파워트레인이 좀 거칠다. 막히는 길에서 연달은 가속과 감속 연결이 부드럽지 않고, 3기통 엔진은 저속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1,100~1,300rpm 사이에서 가속할 때 엔진 진동이 운전대를 가볍게 흔든다. 피스톤이 두 개씩 짝지어 서로 충격을 상쇄하는 4기통과 달리 피스톤 개수가 홀수인 탓이다.

불평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멀어짐에 따라 도로가 뚫리면서 점점 입꼬리가 올라간다. 고속 주행 안정감이 빼어나다. 묵직한 감각으로 자잘한 충격을 효과적으로 걸러내며 나아간다. 특히 적당히 무거운 운전대는 쉽사리 꺾이지 않을 믿음을 준다. 동급 소형 SUV를 다 타본 기자가 감히 단언컨대 고속 주행 안정감만큼은 단연 발군이다.

게다가 쾌적하다. 저속에서의 거친 감각은 속도가 빨라지며 사라진 지 오래. 노면 소음도 소형 SUV답지 않게 꼭꼭 틀어막았고, 엔진 소리 역시 항속 중 자취를 감춘다. 앞 차음형 윈드실드와 엔진 소음을 분석해 반대 위상 소리로 소음을 잠재우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이 어우러진 결과다. 장거리 위주의 미국차다운 성향이 고스란히 담겼다.

트레일블레이저 직렬 3기통 1.35L 가솔린 터보 엔진. 5,600rpm에서 최고출력 156마력, 1,600~4,000rpm에서 24.1㎏·m 최대토크가 나온다

힘은 딱 알맞다. 1.35L 엔진에 터보 과급기를 붙여 끌어낸 156마력 출력은 일상을 여유롭게 아우른다. 특히 24.1㎏·m 최대토크가 1,600~4,000rpm까지 넓은 범위에서 나오는 덕분에 일상적인 속도에서는 활기차게 가속한다. 다만 고속 추월 가속력은 다소 아쉽다. 시속 110㎞ 이상의 속도에서 추월 가속을 시도하면, 활기찼던 저속과 달리 느긋하게 반응할 뿐이다. 역시 배기량 한계는 또렷했다.

트레일블레이저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개척자, 선구자'다

가벼운 험지를 달리다

주행 거리계가 200㎞를 가리킬 때 즈음 목적지 초입에 도착했다. 지금부턴 오프로드다. 아무도 발 들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한 차박을 원한다면 맞닥뜨려야만 하는 코스다. 트레일블레이저는 우리말로 ‘개척자’라는 의미심장한 이름값을 할까?

호기롭게 험지에 차를 밀어 넣자 바닥이 요란하게 울린다. 여름철 길쭉하게 자란 풀들이 차 바닥을 스치는 소리다. 차체도 좌우로 요동쳤으나, 다행히 바닥 긁는 소리는 없었다. 하긴, 땅에서부터 차체 밑바닥 최저 높이가 203㎜(8인치)다. 끽해야 170㎜ 정도에 불과한 동급 소형 SUV를 가볍게 웃도는 높이 덕분에 웬만한 오프로드는 거뜬하다.

마침내 아무도 없는 조용한 호숫가에 도착. 잠잘 생각하며 자리를 잡아본다. 조건은 두 가지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평평한 바닥, 그리고 트렁크를 열었을 때 펼쳐지는 멋진 풍경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차를 이리저리 돌리는데, 호숫가 물 머금은 물렁물렁한 땅이 쉽게 무너진다.

결국 한참 움직이다 앞바퀴가 슬슬 미끄러질 찰나, AWD 버튼을 누르자 물젖은 오르막을 너무나 쉽게 올라선다. 요즘 ‘SUV에 사륜구동이 무슨 필요냐’는 얘기가 많지만, 이런 경험 한두 번 해보면 그 든든함에 취해 버린다.

뒷좌석을 평평하게 접은 모습. 눕기에 충분하지 않은 공간이다. 참고로 트렁크 용량은 1,470L

키 180cm도 거뜬하다고?

이제 자리도 잡았으니 본격적으로 잠자리를 만들 차례. 2열 시트를 눕히자 나름대로 평평한 바닥이 생긴다. 등받이 각도가 살짝 달라 완전히 평평하진 않은데, 잠자기에 걸리적거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길이가 짧다. 뒷좌석 등받이 끝과 트렁크까지 거리가 어린아이 아니고는 못 눕겠다. ‘이거 어떡하지?’

동반석을 최대한 앞으로 당긴 모습. 미국에 판매하는 트레일블레이저는 완전히 접히기도 한다


1열 팔걸이에 매트를 걸 수 있다 / 기자는 캠핑 의자로 빈 공간을 채웠다

사실 이렇게 작은 차급에서 등받이부터 트렁크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리라고는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현 갤로퍼 오너의 노하우로 조치를 취했다. 동반석을 최대한 앞으로 밀어버리고 폭신하게 공기 채워 넣은 두툼한 매트를 깔아 넣는다. 다행히 등받이 끝과 1열 팔걸이 높이가 비슷해 매트 걸치기에도 딱 좋다. 그리고 붕 뜬 다리 공간엔 무언가 채워 넣기만 하면 간단 평탄화 끝이다.

길이 188㎝, 너비 66㎝ 1인용 캠핑 매트가 실내에 쏙 들어간다. 너비가 좁아 두 개는 못 깔겠다

이렇게 하면 길이 188㎝, 너비 66㎝ 1인용 매트가 실내에 쏙 들어간다. 키 177㎝ 정도인 기자는 넉넉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바로 누웠다. 차 바닥에 눕자 파노라마 선루프가 눈에 들어온다. 언제 천장이 유리창인 집에서 자볼까 했더니, 그날이 오늘인 모양이다.

두꺼운 트렁크 바닥 판

인상 깊은 점은 탄탄한 트렁크 바닥이다. 보통 다른 SUV 트렁크에 올라가면 트렁크 판이 무게 때문에 휘기 쉬운데, 트레일블레이저 바닥은 80㎏ 대 기자의 육중한 무게도 든든하게 버텨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접 들어봤더니 바닥 두께가 사진으로 보듯이 무척 두툼하다.

사방이 창문으로 트인 실내는 제법 쾌적하다

다만 실내에 앉아 무언가 하기는 좀 애매하다. 허리 세워 앉으면 머리가 닿는다. 그저 트렁크 쪽에 쿠션 가득 채워 넣은 후, 등 기대고 앉아 책 읽거나 스마트폰 보는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물론 실내 길이가 188cm을 넘으니 엎드려 스마트폰 보기에도 충분하다.

실내 조명만으로 찍은 야간 사진. 예상 외로 아늑했다

차박의 매력

일행과 수다 떨다 보니 어느덧 호숫가에 어둠이 찾아왔다. 드디어 잘 때다. 그런데 예상 못 한 비까지 쏟아진다. 애써 뒤 창문마다 모기장 설치해놨건만, 창문 끝까지 꼭꼭 올리고 잠을 청해야 했다.

스카이풀 파노라마 선루프 / 선루프에 빗방울이 맺힌 모습. 야간에 보면 또 색다르다

‘쏴아아’ 굵직한 빗방울이 선루프와 철판을 시원하게 두들긴다. 선루프 밑에서 보고 있노라면, 유리창 치는 물방울에 은은한 달빛이 슬쩍 비치는 모습이 무척 운치 있다. 괜히 감상에 젖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며 빗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이런 감성이 바로 차박의 매력이 아닐까.

오전 일곱 시경. 절로 눈이 떠졌다. 개운했다. 평평한 바닥에서 잠 한 번 안 깨고 푹 잤다. 사방에 펼쳐진 유리창에 서린 김을 보니 트레일블레이저가 나름대로 차가운 산 공기도 막아준 모양이다.

눈만 뜨면 산뜻한 자연을 코앞에서 맞이할 수 있다

백미는 트렁크 들어 올릴 때다. 스마트키 트렁크 버튼 두 번 누르면 물안개 옅게 낀 아침 호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찬 바람이 떡진 머리를 휘감으며 정신을 깨운다. 산뜻한 아침이 밝았다.

SUV답다

트레일블레이저와 함께한 차박. 사실 소형 SUV이기에 기대도 안 했건만, 나름대로 차박의 동반자로 흠잡을 데 없었다. 동급에서 흔치 않은 평평한 바닥과 키 188cm 성인까지 소화하는 공간, 장거리 여행에 초점을 맞춘 주행 성향, 그리고 도로 위를 벗어날 수 있는 높은 지상고와 사륜구동 시스템까지. 요즘 무늬만 SUV들이 판치는 가운데 트레일블레이저는 제법 SUV다운 다재다능한 매력을 지키고 있었다.

<제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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