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과 방패의 승부, 르반떼 트로페오 & 카이엔 쿠페 터보

조회수 2020. 7. 30. 09:1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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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세라티와 포르쉐가 창과 방패의 승부를 펼쳤다. 페라리 엔진 품은 르반떼 트로페오는 과연 엔지니어링의 정수를 담은 카이엔 쿠페 터보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마세라티 르반떼 트로페오를 깨우고 출발하는 순간 이동식 오페라 극장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뜬눈으로 명상에 잠긴 듯 기분이 묘했다. 차창 너머 풍경마저 달라 보였다. 엔진 회전수를 높이면 마치 빠른 악장으로 치닫는 클래식 음악의 클라이막스를 듣는 듯했다. 코너에서 속도를 줄이고 다시 가속하기를 반복할 때마다 연주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객처럼 기뻤다. 마세라티가 만든 차에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도 배기음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소리 명가가 아니던가. 하지만 이 차는 차원이 다르다. 소리로 운전자의 심금을 울리는 진정한 감성파다.

같은 길을 달려도 포르쉐 카이엔 쿠페 터보의 감각은 사뭇 달랐다. 트로페오가 쾌속 여객선이라면, 카이엔은 거친 파도를 헤치는 군함처럼 위풍당당했다. 서스펜션이 딱딱하거나 승차감이 불편한 건 아니다. 오히려 움직임이 안정적이고 듬직했다. 언덕을 하나씩 점령할 때마다 거친 배기음은 행진곡이 되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어떤 길을 마주하든 겁나지 않았다. 더욱이 스포츠 크로노 패키지가 적용되어 있어서 스포츠 리스폰스 버튼으로 뜀박질을 훨씬 짜릿하게 만들 수 있었다. 포르쉐에겐 토마호크 미사일 같은 강력한 필살기다. 버튼을 누르고 스로틀을 활짝 열면 20초 동안 상대를 단칼에 베어버릴 듯한 기세로 돌진한다.

목적지에 도착해 잠시 그늘을 찾았다. 동료들과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슈퍼 SUV에 대한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포르쉐가 카이엔을 내놓으면서 고성능 SUV 시대를 열었던 때가 2002년이다. 뒤이어 출시한 터보와 터보 S 모델은 경쟁자의 추격을 가볍게 따돌렸다. 이전까지 SUV는 오프로드를 달릴 수 있거나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자동차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러나 포르쉐는 이전에 없던 고성능 SUV를 세상에 내놓고 고정관념을 깼다. 애초부터 고성능 SUV로 ‘슈퍼’의 영역에 군림하겠다는 계산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점이 늦기는 했지만, 점점 커지는 고성능 SUV 시장을 마세라티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이에 출사표를던진 차가 르반떼였다. 점점 치열해지는 출력 경쟁은 530마력 GTS도 모자라 추가로 60마력을 발휘하는 트로페오까지 탄생시켰다(람보르기니 우루스를 정조준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출력 면에서는 카이엔을 따라잡은 셈이다(물론 해외에는 680마력을 발휘하는 카이엔 터보 S E-하이브리드가 있다).

하지만 힘든 싸움이다. 카이엔은 난공불락 요새처럼 보인다. 인기는 여전히 바위처럼 굳건하고, 브랜드 가치가 그 주위를 강철처럼 둘렀다. 더욱이 터보 모델은 포르쉐 엔지니어링의 결정체. 다시 말해 가치가 입증된 슈퍼 SUV다. 사이즈는 여느 준대형 SUV와 비슷할지 몰라도 포르쉐는 커다란 SUV를 스포츠카처럼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2세대 파나메라를 통해 먼저 선보인 V8 4.0L 트윈터보 엔진(람보르기니 우루스, 아우디 S8, 벤틀리 벤테이가를 비롯해 폭스바겐 산하 몇몇 모델이 같이 쓰는 엔진이다)은 최고출력 550마력, 최대토크 78.6kg·m을 발휘한다. 지칠 줄 모르는 엄청난 출력을 지녔지만, 부드럽게 분출할 수도 있어서 다루기가 어렵지 않았다. 스티어링 감각은 제법 날카로워서 큰 덩치를 몰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거친 코너도 버거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운전자 시선을 따라 척척 소화해버렸다.


경량 스포츠 패키지(1520만원)를 적용한 시승차는 움직임이 더 민첩해졌을 터다. 카이엔 쿠페에 기본으로 제공되는 파노라믹 글래스 루프를 벗고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 경량 탄소섬유 루프로 바꿔 장착하는 옵션이다. 경량 스포츠 패키지를 선택하면 스포츠 배기시스템도 따라온다. 실내에 들어차는 배기음을 애써 막지는 않는다. 카이엔은 사분사분한 벤테이가와는 180도 다르다. 스포츠카 명가의 자제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쿠페형 카이엔은 심지어 기존 카이엔보다 더 잘생겼다. 앞유리와 A필러를 조금 뉘고, 뒤쪽을 20mm 낮췄을 뿐인데 결과물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가변 리어 스포일러가 이런 외모에 맵시를 살린다. 이제껏 가변 리어 스포일러가 달린 SUV는 없었다. 카이엔 쿠페가 SUV 최초다. 시속 90km 이상으로 달리면 135mm 전개되어 이로 인해 생성되는 다운포스로 뒷바퀴에 접지력을 더한다. 막강한 힘을 순식간에 잠재울 만큼 강력한 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이 뛰어난 주행성의 화룡점정이다.

역동성을 과시하는 카이엔 쿠페 터보와 비교하면 트로페오의 파워트레인은 소박한 수준이다. 단, 파워유닛은 GTS에 사용한 페라리 F154 계열 V8 4.0L 트윈터보 엔진을 다듬어 달았다(최고출력 590마력, 최대토크 74.85kg·m의 힘을 생산한다). 생동감 넘치는 페라리표 괴물 엔진을 품은 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론치컨트롤을 경험할 시간이다. 오직 트로페오에게만 허락된 코르사 모드로 놓고 차체를 발사하면 발진 가속력이 엄청났다(0→시속 100km 기록은 3.9초. 카이엔 쿠페 터보와 같다).

앞서 말했지만, 감미로운 배기음은 정말이지 명불허전이다. 페라리의 여러 모델이 같은 계열의 엔진을 올리지만, 마세라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배기음 요리 맛집이다. 기어 단수를 낮출 때마다 포효하는 다운시프트 소리가 특히나 환상적이었다.

아쉬운 부분은 엔진과 섀시의 조합이다. 힘을 와장창 쏟아낼 때마다 통키의 불꽃슛을 겨우 받아내는 상대 팀 선수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고시속 304km까지 밀어붙였을 때를 상상하니 아찔했다. 이래서는 시속 200km에서조차 안정적일 것 같지 않았다. 육중한 무게(2300kg)를 감추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제동할 때는 강력한 브레이크가 무게를 상쇄하지만, 문제는 코너링이었다. 허리춤에 물주머니를 찬 듯 움직임이 불편했다. 그나마 언더스티어로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운동 성능은 포르쉐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고급스러움은 뒤지지 않는다. 실내는 스포티함과 우아함이 공존한다. ‘피에노 피오레’로 불리는 최상급 천연 가죽으로 덮은 스포츠 시트 외에도 눈에 보이는 요소 하나하나에 가죽, 탄소섬유를 비롯한 고급 재료를 아끼지 않았다. 두 모델은 운전자 보조 시스템을 필요 이상으로 담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차를 타면서까지 컴퓨터에 운전을 맡기고 싶진 않다. 소중한 특권을 빼앗기는 기분이니까.

카이엔은 세상에 고성능 SUV라는 장르를 선보인 선구자다. 라이벌 SUV 모델들이 턱밑까지 추격해 오더라도 포르쉐 특유의 주행성은 언제나 최고 수준이었다. 카이엔 쿠페 터보는 관리가 힘들 듯싶은 패브릭 시트만 빼면 딱히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운전 재미에 대한 환상을 가진 이에게 카이엔보다 매력적인 SUV는 찾기 어렵다.

사실 길에서 르반떼 트로페오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을 듯싶다. 국내 시장에는 한 해에 10대씩만 한정 판매하는 까닭이다. 카이엔과 겹치는 부분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트로페오는 성격이 조금은 다르다. 쉽게 말해 카이엔이 오랜 세월 연마한 무림 고수 같다면, 트로페오는 귀족 집안 출신 무관 같다. 비단 운동 성능뿐만 아니라 배기음, 희소성, 럭셔리 감성을 비롯한 감미로운 매력으로 고유의 풍미를 극대화한다. 두 모델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어찌 보면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슈퍼 SUV니까.

박지웅 사진 이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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