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보잡' BMW가 미국에서 성공한 비결은?

조회수 2020. 7. 2. 13:53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한 편의 영화 같은 BMW의 성장 스토리(3)

자동차계에 ‘골목식당’ 같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BMW는 후보 1순위였다.

1950년대 BMW는 속된말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전후 경기불황을 고민하지 않은 최고급 세단 501, 벤츠 300SL 잡으려다 회사를 잡을 뻔한 스포츠카 507 등이 대표적이다. 300㏄도 채 안 되는 모터사이클 엔진 얹고 등장한 삼륜차 이세타는 여느 BMW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가격도 그렇고.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와 컵 떡볶이를 같이 파는 꼴이었다.

BMW 507

BMW는 항공기 엔진과 모터사이클 제조에 뿌리를 둔 엔지니어링 회사다. 그러나 장사꾼은 아니었다. 당대 동향파악은커녕 소비자가 어떤 차를 원하는 지도 몰랐으니까. 우글거리는 공대생들의 집약체 같은 BMW가 변화를 꾀한 건 콴트 가문이 등장하면서다. 그들은 경쟁력 있는 가격의 중간급 차 개발을 지시했고, 그 결과 BMW ‘뉴 클래스’가 태어났다.

BMW 1500, 2000CS, 2002 등이 ‘뉴 클래스’의 일원이다. 작고 다부진 차체와 칼날처럼 예리한 핸들링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카앤드라이버> 등 미국 자동차 전문지는 BMW의 주행성능을 ‘경이롭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 최대 미국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히피들의 마음은 뺏었지만, 캐딜락 좋아하는 진성 미국인은 콧방귀도 안 뀌었다.

BMW 뉴 클래스 1800

1970년대 초 설문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BMW를 영국 자동차 회사쯤으로 생각했다. 1년에 잘 해야 1만 대 정도 파는 유럽의 ‘듣보잡’ 업체로 여겼다. 한 광고회사는 BMW 2002를 골프클럽 주차장에 세우고 회원들의 생각을 물었다. 체크무늬 바지와 꽈배기 스웨터 입은 그들은 벤츠나 캐딜락보다 작은 차가 가격은 비슷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고급차’는 넉넉한 차체 크기와 가죽으로 치장한 실내, 8기통 대배기량 엔진이 필수적이었다. BMW는 남다른 운전 재미와 엔진 성능으로 당당히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좁고 불편한 소형차에 불과했다. 심지어 1970년대 마르크 화폐가치가 최악으로 떨어져 찻값도 비쌌다. 뷰익이나 링컨 등 정통 미제 세단 좋아하는 미국인이 BMW에 관심 가질 리 없었다.


‘카 가이’ 밥 루츠를 마케팅 책임자로 고용하다

BMW는 고급차, 고품격의 정의를 다시 세워야했다. 마케팅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GM 제품개발 부서에 있던 밥 루츠를 데려왔다. 그는 자칭 ‘카 가이(Car Guy)’다. 해병 장교 출신으로 전투기와 머슬카, 시가를 좋아하는 마초 사나이다. 1963년 자동차 업계에 발을 디뎌 훗날 포드, 크라이슬러, GM 등 빅3의 리더 자리를 모두 거친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할 자동차 회사가 빈 카운터스(재무전문가)에 휘둘려 비용절감과 숫자놀이에 빠지다 보면 반드시 몰락한다”며 GM의 제품개발 부서를 개혁한 주역이다. ‘스포츠맨의 자동차’를 슬로건으로 앞세운 BMW가 딱 원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밥 루츠는 BMW의 미국 내 성장을 위해 뉴욕의 광고대행사들에게 사업제안 요청서를 보냈다.

밥 루츠

최종 후보에 3개 업체가 올랐다. 대통령 등 정치인의 선거용 광고를 제작해온 <벤튼&바울스>, 오랜 역사의 인물 광고회사인 <테드 베이츠>, 신생 업체인 <아미라티&퓨리스>다. 카 가이의 선택은 마지막이었다. 전통적인 광고 회사에 도전장 내민 <아미라티&퓨리스>의 ‘반항기’가 BMW와 닮은 구석이 있어서다. 특히 피아트 미국 광고로 성공한 바 있다.

당시 이 광고업체는 BMW의 핸들링이 그동안 작업했던 다른 차보다 월등하단 걸 느꼈다. 벤츠, 볼보, 피아트와 비교할 때 BMW는 마치 철로 위에서 움직이듯 달린다고. 광고 전략으로 ‘최고의 드라이빙 머신’을 택한 이유다. 다소 고전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한 줄의 문장으로 BMW의 정체성을 담백하게 내세웠다. 그리고 이 문구는 BMW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3‧5‧7, 창의적인 이름으로 새 판을 짜다

BMW는 ‘뉴 클래스’의 후속 타자로 코드네임 E12의 새로운 중형 세단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전보다 차체를 훌쩍 키우되, BMW 특유의 운동성능을 녹여 활로를 모색했다. 디자인은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수장이자 당대 자동차 디자인을 쥐고 흔든 마르첼로 간디니에게 맡겼다. 그는 람보르기니 미우라, 란치아 스트라토스 제로, 마세라티 기블리를 빚은 거장이다.

BMW 5시리즈

1972년, 드디어 결과물이 등장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BMW 5시리즈다.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듯한 자태, 네 개의 원형 헤드램프가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다. 특히 엔진에 따라 525i, 530i 등으로 나눴는데, 이때 당시 하나의 모델에 여러 종류의 엔진을 쓰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BMW는 5시리즈 출시를 계기로 이름 체계를 개편하고 나섰다.

BMW 5시리즈

마쓰다 북미법인 전 CEO 찰리 휴즈는 “BMW는 이상적인 숫자+문자 조합을 만든 회사다. BMW의 모델명은 소비자에게 프리미엄 브랜드를 연상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단순하면서 체계적인 모델 이름은 소비자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다양한 엔진과 컬러 조합으로 고객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란 느낌을 줬다.

5시리즈는 다양한 의미에서 BMW의 ‘새 시대’를 연 주역이다. 더 이상 소수의 애호가를 위한 차가 아니었다. 넓은 객실과 트렁크, 실내 소재에 집중한 결과, 메르세데스나 캐딜락으로 골프 즐기는 미국인의 마음을 단숨에 돌렸다. 더욱이 짜릿한 운동성능은 세단의 전통적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 방점을 찍는 게 525i의 직렬 6기통 ‘실키식스’ 가솔린 엔진이다.

BMW 5시리즈

자동차 전문지 <로드앤트랙>은 “BMW의 신형 6기통 엔진은 ‘보석’이다. 6,200rpm까지 올라가면 포르쉐 911처럼 유쾌하게 그르렁거린다. 동급의 경쟁 차보다 빠르고 더 스포티하며 더 장시간 달릴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컨슈머가이드>는 “다이내믹한 성능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꼼꼼한 장인 기술로 만들었고, 실용적이며 스포티하다”고 평가했다.


배기량 높은 엔진은 연비가 떨어진다? 편견 뒤엎은 BMW

그러나 탄탄대로 같은 5시리즈 앞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터졌다. 중동지역 6개 석유수출국은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했다. 이른바 ‘오일쇼크’다. 배럴당 2달러59센트였던 중동산 기준원유 값이 1년 만에 11달러65센트로 4배나 껑충 뛰었다. 때문에 배기량 높고 기름 벌컥벌컥 마시는 차 대신 작고 연비가 좋은 차가 필요했다.

특히 BMW처럼 운동성능을 앞세운 브랜드에겐 치명타였다. 그러나 BMW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성능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까다로운 규제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가령, ECU를 통해 연소시간과 연료분사를 치밀하게 조정했다. 덕분에 BMW의 직렬 6기통 엔진은 경쟁 업체의 V6 엔진보다 연비가 뛰어났고, 심지어 4기통 엔진과 비슷한 효율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위기는 엔지니어링으로 극복하는 BMW의 역량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960년대 BMW ‘뉴 클래스’의 일원인 2002의 후속 모델도 개발하고 있었다. 작고 다부진 차체를 바탕삼아 BMW 특유의 날카로운 핸들링을 녹이고, 연비 좋은 4기통 엔진을 얹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1975년, 드디어 결과물이 등장했다. BMW의 월드 베스트셀러, 3시리즈다.

1975 BMW 3시리즈

“당신이 BMW를 운전합니다. BMW가 당신을 운전하는 건 아닙니다.” 당시 3시리즈의 광고 문구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자동차 업계가 휘청거릴 때, BMW는 ‘스포츠맨의 자동차’란 타이틀을 포기하지 않았다. 뒷바퀴 굴림(FR) 방식과 50:50의 무게배분으로 ‘BMW의 가치’를 계승하되, 뛰어난 연비까지 만족시키며 BMW의 중심 모델로 우뚝 섰다.

또한 BMW는 밥 루츠의 지휘 아래 1972년 ‘BMW 모터스포츠’를 세웠다. 그는 레이스 참가를 통해 BMW의 이미지를 더욱 탄탄히 다지고자 했다. 당시 BMW 모터스포츠 수석 엔지니어인 파울 로쉬는 3시리즈를 밑바탕 삼아 레이싱 버전을 만들었다. 독일과 북미에서 열리는 경주에 내보내 자동차 마니아를 열광케 했고, BMW 전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다음 회에 계속)


글/강준기(로드테스트 기자)

사진/BMW

참고문헌 : <BMW 성공신화의 비밀|데이비드 카일리 저자>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